200505072214
이규태의 <역사산책> - 머릿말
머리말
세상은 자꾸만 좁아지고 있다. 사람 사는 집이며, 입는 옷, 먹는 음식까지도 같아지고 있으며, 머리속의 사상과 손끝의 기술, 심지어는 종교적, 예술적 감동까지도 같아지고 있다. 이렇게 좁아져가다가는 다를 것이 하나도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한국아이에게 블루진만을 입히고 햄버거만을 먹이며 팝송만을 들려주며 기른다 해서 미국적인 체험을 우리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이며, 장삼을 입히고 아침 저녁으로 성지(聖地)를 향해 예배하며 양고기를 먹는다 해서 회교적(回敎的)인 체험을 우리 것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나라, 그 민족, 그 문화권에게는 그 나름의 변하지 않는 기억(記憶)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유태인은 유태인 나름의 기억이, 이탈리아인에게는 이탈리아인 나름의 기억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기억이야말로 좁아지는 지구촌에서 떳떳이 살아남을 수 있는 민족적 존재증명(存在證明)이기도 하다. 그 기억이 없는 민족은 마치 물에 물탄 듯 좁아지는 세계 속에 소멸되어 버리지만, 그 기억이 있는 민족은 국에 소금탄 듯 좁아지는 세계 속에서도 뚜렷이 그 몫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근대화 과정에서 천대하여 버림받고 또 등한시되어 왔던 것이 바로 이러한 <기억>들이기도 하다. 마치 미이라처럼, 흡사 건포도처럼 말라비틀어져 죽어 있거나 또 죽어가는 이 기억들을 찾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망각의 늪에 갇힌 그 기억들을 건져내어 오염된 때를 씻고 닦아 미래에 조감케 해보려는 것이 바로 이 <역사산책>이다.역사산책>기억>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역사의 현장에 직접 들러 잊혀져가고 있는 역사와 민속, 인물과 사상, 그 휴머니즘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구성하여, 국제화 시대가 진행될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우리 한국인 나름의 오랜 기억을 다시금 깨워 보려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뜻이었다.
그 뜻이 만의 하나라도 참되게 건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며, 이 글을 처음 쓰던 당시의 인물과 현장이 지금과는 다소간 다른 곳이 없지 않겠으나 역사를 거슬러 반추해 보는 큰 마음으로 헤아려 주기 바란다.
1986년 10월
李 圭 泰
- 2005/05/07 22:14 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