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5081827
이규태의 <역사산책> - 삼전도한비
삼전도한비(三田渡汗碑)
필자가 남한산성 서문을 빠져나와 구길을 물어 한강 연변인 삼전도(三田渡)를 거꾸로 찾아나가는 뜻은, 인조(仁祖)가 걸었던 치욕적인 항복의 길을 더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은 이름만 남았고 터를 확인할 수 없는 호군(胡軍)의 진영 터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이다.
송파(松?)의 신시가가 들어앉은 너른 들판과 삼전도의 중간 지점이 진터벌이라기도 하고 그보다 더 남쪽에 있는 벌판이라기도 한다. 다만 인조가 항복을 한 곳이 호군의 본진(本陣)이었을 것이고 또 당시 가장 큰 나루가 송파요, 호군의 보급로도 바로 그 나루였기에 전자의 추정이 옳은 것 같았다.
필자는 지금 이 진터벌에서 세 가지 일을 따로따로 생각해 보고 그 따로따로의 실가닥을 한가닥으로 꼬는 사색의 작업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 첫 이야기는 구름일 듯 북쪽에서 일어난 호국(胡國)이 멀지 않아 우리나라를 침공해 들 것이라는 불안 속에 맞던 병자년 초봄의 일부터 시작된다.
당시 인조반정(仁祖反正) 공신인 김 유(金 ) 대감 부인의 생일잔치가 벌어졌는데, 명망이 있었던 만큼 백관대작의 아낙네들이 잔치에 몰려들었다. 아무리 정사와 외면한 아낙네들이라지만 국운이 걸린 이 호국의 야욕은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호병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피신을 하고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대해서 말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부덕을 쌓고 또 가문의 명예도 함께 지니고 있는 터라 한결같이 치마끈으로 목을 매어 자결하겠다느니, 치마를 둘러쓰고 한강에 몸을 던지겠다느니 했다. 더러는 헛죽음을 하느니 한놈 죽이고 죽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유독 김모 승지 부인만은 용기 있는 견해를 말하였다. 그녀는 태연한 어조로 그때 당해 봐야 알 일이지 미리부터 자기 행실을 규제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말은 아낙네들의 빈축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중 곁에 앉아 있던 이모 참판 부인은 막말을 해서 무안을 주기까지 했다. 당해 보아야 알 일이라니 되놈에게 몸을 팔 더러운 년이라고.
결국 호군은 쳐들어왔고 인조는 남한산성의 행궁(行宮)으로 피신하였다. 고관대작의 선택받은 부인들도 뒤따라 산성으로 피난했다가 다시 임금이 강화로 피신할 계획을 세우자 이 고관 부인들도 강화로 발길을 돌렸다. 드런데 이들은 한강을 건너가기 전에 호군에 생포되었다. 호진에 사로잡혀간 부인들 가운데는 치마를 둘러쓰고 강물에 몸을 던지겠다던 참판 부인도, 그때 당해 봐서 처신하겠다던 승지 부인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 두 부인의 태도는 너무나 현격하게 역전되고 말았다. 자결하겠다던 참판 부인은 호장의 요구를 호락호락 받아들여 그의 애첩이 되더니 그 나름의 세도를 부리다가 호장을 따라 청나라에 들어가 여생을 살았다. 반면에 승지 부인은 항거하다가 끝내 성난 호장의 명령으로 혹독하게 살해되어 갈래갈래 찢긴 채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그리고 호군의 징발된 사역군에 의해 진터벌 어딘가에 매장되었던 것이다.
후에 그녀의 후손이 사역군을 동원, 시체를 찾아 헤맸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진터벌의 주민들은 날이 가물면 승지 부인의 원혼 때문이라 하여 토속신(土俗神)으로 숭앙해 내렸다는 비가의 현장이다.
또 구한말 때까지만 해도 송파의 아낙네들은 수의계(守義契)라는 계를 맺어 인조가 호진에서 항복하던 날을 잡아 이 김 승지 부인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졌다 한다. 이 모임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합창이 불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들은 노인들은 있으나 그것을 부를 줄 아는 전승자는 없어 마냥 아쉬운 맘 금할 수 없다. 무척 슬프고 은은한 곡조여서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가곡 ‘리타나이’ 같은 여운일까. 중세에 원한 품고 죽은 한 처녀의 제삿날에 그 영혼을 달래는 북부 독일의 여인들이 부르던 합창곡인 리타나이와 그 뜻이 너무도 같으니 말이다.
합창은 구심력이 있는 단결의 표상이다. 우리나라에는 구심점이 없기에 합창이 발달될 요건이 없었다. 이같이 한 여인의 원한이 구심점이 되어 계가 맺어지고 합창이 발생했음을 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유한 부인들의 바람계, 도박계로 감방에 집단으로 들어가 부르는 탄식의 합창인 요즈음 세상과 대조되는 아름다운 전통의 발전인 것이다.
필자는 발길을 강변 쪽으로 돌려 옛 삼전도의 아래턱에 있었다고 기록된 한 당집을 찾아나섰다. 강역의 침식과 개발로 강변의 유적을 찾는 어리석음을 여러 차례 체험했으면서도 행여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 당집이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아 열심히 수소문하였다. 그러나 그 당집은 영원히 사라지고 없었다.
1956년에 간행된 지지(地誌)에는 이 당집이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역사의 증거물이 사라진 것은 극히 근간의 일인 것 같다. 그러나 훗날 우리 백성간에 역사 의식이 성숙되는 날에 이 역사의 증거를 재현시키기 위한 자료로써, 또 토속신이 된 김 승지 부인과 더불어 한국 여성의 한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살펴보고 넘어 가야겠다.
급변하는 북방 정세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의 수축이 시급했다. 단시일에 쌓아야 한다는 지상명령에 서남 방면의 수축을 맡은 이 회(李晦)는 다른 동북 편을 맡은 승군(僧軍)에 비해 진행이 늦었다. 따라서 식량의 소모도 늘어 갖은 잡음과 모략이 잇달았다.
이 회는 죽기 전에 식량 소모로 축성에 차질이 날까 두려워하여 그의 아내를 영남지방에 보내어 사사로이 양곡조달을 시켰다. 부인이 곡식을 싣고 삼전도에 배를 댔을 때는 이미 이 회의 사형이 집행된 후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은 통곡하면서 싣고 온 쌀섬을 퍼서 여울에 마냥 쏟아 버렸다. 모두 쏟아 버리고 그 여울에 몸을 던져 버렸다.
그래서 그 여울은 쌀섬 여울(米石灘)이라 불려왔고, 그 쌀섬 여울의 강 언저리에 이씨 부인의 원혼을 달래는 신당을 지어 토속신으로 좌정시킨 것이다.
이 회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이 뒤에 판명되어 서장대 아래 해원(解寃)의 당집 청계당(淸溪堂)을 지어 모셨는데 날 좋은 날에는 이 당집에서 쌀섬 여울의 이씨 부인 신당이 조감되었다 한다.
이씨 부인은 그녀가 강물에 쌀을 퍼부었을 때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고 또 아무 말 없이 침묵 속에 작업하였듯이 지금 이씨 부인은 그 자리에 좌정하여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무언의 침묵이 말하는 소리를 느낌으로 들어온 것이다.
바로 그 신당의 위쪽에 높은 층계의 화려한 채각(彩閣)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청 황제 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는 이름의 병란 전승비이다.
비문 가운데 보면 남한산성 공략 때 청 태종이 머물렀던 삼전도의 염장(鹽場)이 있는데 바로 그 자리에 세웠다 한다.
그 비의 내용은 평화를 파괴한 것은 조선측이고 남한산성의 인조가 청군 두려워하기를 봄얼음 밟듯했으며, 전후 황제가 오직 죽이지 않은 것으로 덕을 폈으며, 그 위덕에 꿩처럼 흩어졌던 백성이 원근에서 모여 들어 마른뼈에 다시 살이 붙고 찬뿌리에 다시 봄이 온다는 식으로 써내렸다.
이 공덕비는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푸대접을 받아와, 청일전쟁때 매몰되었다가 1895년에 다시 세워졌다. 1956년에는 문교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속에 묻었다가 또다시 파내었다. 그러나 강역 침식으로 그 옛 터에 세울 수가 없자 안쪽으로 들여 지금 송파 신시가 앞 너른 들판에 세워졌다.
이 금욕적인 비문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한성판윤 오 준(吳竣)은 그 인간적 갈등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워했다. 그는 이 비문을 쓴 다음 양심을 구하고자 벼슬을 버렸고, 붓을 꺾어 두 번 다시 글씨를 쓰지 않는 등 자책과 자학으로 여생을 살았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글을 쓴 그의 오른손을 돌로 찍어 병신을 만들기도 했다. 고금 한국의 예술가 가운데 그 자신의 예술 때문에 이토록 마음 아파했고 또 극한 상황에서 허덕였던 예술가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악마에 팔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허다한데 말이다.
오 준의 인간적 갈등은 그의 죽음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몸은 싸늘해진 지 오랜 데 눈물은 따뜻하게 오랫동안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즉 시체가 눈물을 흘린 것이 된다. 통탄의 표현 치고 이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석양의 조명으로 비문의 끝에서 오 준의 이름을 보고 그 곁에 이 비문을 지은 이○○의 이름이 깎여 있음을 확인한다.
건비(建碑)를 수명받은 이조판서요 대제학인 이경석(李景奭)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역시 억지 명을 받고 한 일이라 그의 후손이 그 치욕적인 비석에 이름이 남아 있음을 언짢게 생각하여 쪼아 버린 것일 게다.
사적(史蹟)으로서 이 굴욕비의 가치보다 이 비석에 얽힌 한국인의 비극적 상황에서 필자는 보다 큰 가치를 보고 숙연해져서 돌아선다.
- 2005/05/08 18:27 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