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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의 <역사산책> - 동악선생시단

동악선생 시단(東岳先生 詩壇)

시를 생활화했던 옛 우리 선조들의 시속은 다양하고 멋이 있었다. 이를테면 시종(詩鐘) 같은 것 말이다.

시를 짓는 모임의 규칙은 엄했다. 모임의 복판 천장에다 끈을 드리워 끈 끝에 동전을 달아 놓고 그 아래 구리쟁반(銅盤)을 놓아둔다.

그 끈의 중간 즈음에 일정한 길이의 향조각을 꽂아 놓고는 한 선비가 시 한수를 짓는다. 이 시를 받아 대구(對句)를 지어야 하는 선비는 향에 불을 붙여 향이 다 타기 전까지 작시를 해야 한다. 향이 다 타면 끈이 타게 되어 있고 끈이 타면 끝에 달아 놓은 동전이 동반으로 떨어져 소리가 난다. 쨍그랑 소리가 나면 이 선비는 실격이 된다. 이를 시종이라 했다.

또 시환(詩丸)이라는 것도 있었었다.

선조들은 요즈음처럼 남이 봐 주기 위한 시가 아니라, 나 스스로 족하는 시를 지었다. 그래서 시를 쓰면 그 종이를 마치 환약처럼 둥글게 하여 바가지 속에 저장한다. 그리고 그 시환이 바가지에 가득 차면 그 바가지를 봉해서 강물에 띄운다. 이 시표(詩瓢)는 은둔한 선비들이 곧잘 띄웠다. 뱃사공들이 이 시표를 주우면 횡재를 한다. 왜냐하면 이 시환은 선비들에게 쌀 몇 섬으로 매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뜻 맞는 사람끼리 시사(詩社)를 만들어 철따라 자연과 시를 융화시키는 풍류 또한 대단했었다.

이를테면 정약용(丁若鏞), 이치훈(李致薰) 등 열네 명이 결사한 죽란시사(竹欄詩社)의 경우를 보자.

이 시사의 규약은 살구꽃이 처음 피면 모이고, 복숭아꽃이 필 때와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모이며, 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만개하면 모였다. 또 국화꽃이 피어 있는데 눈이 내릴 때와 한해가 저물기 전에 분에 심은 매화가 피면 이례적이라 하여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서지의 연꽃 집회는 현대인보다 훨씬 세련된 멋이 깃들어 있었다.

서지는 지금의 서대문 밖 금화국민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터에 있던 연못으로 장안에서 연꽃 크고 좋기로 으뜸이었다. 연꽃이 필 때 선비들은 이른 새벽 어둠이 가시기 전에 이 못가에 모인다. 모두 모이면 배를 띄우고 연못 한가운데로 끌고 가 배를 멎고 숨을 죽이고 연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연꽃은 이른 새벽 어둠이 가시면서 피기 시작한다.

이 연꽃이 필 때 가느다란 미성을 낸다. 이 미성을 들을 줄 아는 그 섬세한 감성과 미(美)를 실밥 골라내듯이 집어내어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 얼마나 미에 성숙된 우리 선조였던가.

그리고 청개화성(聽開花聲)을 두고 시를 짓는다. 세상이 오래 되고 넓다 하지만 아마도 꽃 피는 소리까지 들을 줄 아는 백성은 동서고금에 없었을 것이다.

연산군 때 폐모에 분개하여 낙향한 조춘풍이 주축이 되어 결사했던 학시사(鶴詩社)도 기품을 복합시킨 한국인의 멋이었다. 이 결사에 든 선비들은 각기 한 마리씩의 학을 길렀다. 이 양학술(養鶴術)은 적이 형이상학적이고 또 시적인 대목이 많다. 이를테면 시 읊는 소리를 많이 들은 학일수록 눈을 감는 오묘함이 더한다든가, 이른 새벽 꽃이슬로 학 벼슬을 닦아 주어야 선홍(鮮紅)이 더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년에 한 번씩 각기 자기가 기른 학을 안고 가서 서로 상학(相鶴)을 하고 품평한다. 그리고 장원에 뽑힌 학을 가운데 놓고 시를 짓는다.

또 이 결사에서는 섣달 그믐께 날을 받아 제시(祭詩)하였다. 일년동안 지은 시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 제시 습속은 당나라 책 ‘가도전(賈島傳)’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가도란 사람은 시 한수 짓는데 어찌나 심로(心勞)를 했던지 섣달 그믐날 밤 일년 동안 지은 시를 모시고 주포(酒脯)로 제사를 지내는데, 그로써 심로했던 정신을 보기(補氣)하였다 한다.

이 시사의 한 유적으로 서울 필동 동국대학교 내 서북쪽 학생회관 앞에 있는 ‘동악 선생 시단(東岳先生詩壇)’을 찾아볼 수 있다.

동악 선생은 선조 때의 계관시인 이안눌(李安訥)이며, 바로 이 동국대 캠퍼스의 서반이 동악의 집터였다.

순조 때 지은 ‘한경식략(漢京識略)’에 보면 「동악 시단은 남산 묵동 아래 있는데 옛날 동악 이안눌이 그 집 뒤뜰 기슭에 단을 쌓고, 여러 문사들과 함께 시를 읊던 곳으로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 지금까지 그 터전을 사람들이 동악 시단이라 불러왔으며, 그 옆에 흩술(單辨)의 홍매나무가 있는데,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고목이 되었을 그 홍매는 없고, 다만 그 후 영조 때 동악의 현손인 이주진(李周鎭)이 이 시단을 기념하기 위해 새겨둔 여섯 글자만이 옛 터를 지켜내리고 있었다.

이주진은 이 옛 터에 담을 쌓고 폐허가 된 단에 증토하는 한편, 물을 끌어 못을 만들었으며 단풍과 철쭉을 옮겨심어 춘추를 채색케 했다. 그렇다면 지금 자라고 있는 인근의 단풍과 철쭉은 그 옛 뿌리에서 돋아난 것들일 것이다.

동악은 당대의 명류인 이오봉(李五峯), 권 필(權 ), 홍학곡(洪鶴谷) 등 일류시인들을 이곳에 유숙시켜 시단에 모이기도 하고 시루(詩樓)에 모아서 시종이며 시환이며 제시를 하였으니, ‘인계앙지여신선(人階仰之如神仙)’이라 아니할 수 없었겠다.

이 시단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 저항시인 석주(石洲) 귄 필을 생각에서 놓칠 수 없다.

한국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숱하게 많지만 유일하게 시 때문에 죽은 석주의 원혼이 필자 생각의 차원을 바꿔 놓는다.

궁(宮) 버들 청청한데 꾀꼬리 요란하게 우는구나 성에 가득한 관개(冠蓋)가 봄볕에 상긋거리네 조정에서 더불어 태평악을 하례하는 판에 누가 시켜 위태한 말이 포의(布衣)의 입에서 나오게 했나

그는 이 시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

‘궁버들 청청함’은 광해군을 업고 갖은 악세를 자행하고 있던 당시의 외척 유희분(柳希奮)을 가리키고 ‘포의’는 당시 악정을 간절하게 간했다는 이유로 수난받고 있던 임숙영(任叔英)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 시를 짓고 무슨 예감이 들었던지 석주는 자기가 지은 시의 초고를 보자기에 싸서 생질에게 맡기면서 그 보자기에다 다음과 같은 절구 한수를 썼다.

평생에 우스개 글귀를 즐겨 지어서 만명의 입에 숙덕거림을 끌어 일으켰다 이제부터는 입을 봉하고 내 생을 마칠 것이다 옛날에 공자께서도 말 없고자 하셨는데

그는 이 시를 지은 지 사흘 만에 광해군의 어명에 의해 붙들려가 혹심한 형장(刑杖)을 받았다.

당시 좌의정이던 이항복(李恒福)은 임금 앞에 가서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가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반나절 동안 만류했다. 또한 이덕형(李德馨)도 시 때문에 선비를 죽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아뢰었다.

「우리들이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석주를 능히 살리지 못했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 것인가.」

그 후 이항복은 이렇게 자탄하였다 한다.

권 필은 북변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동대문 밖에서 첫밤을 못 넘기고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그가 유숙하던 집 주인이 술을 대접하여 권 필은 많이 취했었는데 이튿날 보니 죽어 있었다 한다. 주인은 방문짝을 떼어서 시상(屍床)을 만들었는데 그 문짝에는 죽기 직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 한수가 적혀 있었다.

삼월은 거의 다 갔고 사월이 오는데 복사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같으니…

그리고 「이것이 시참(詩讖)이다. 내가 죽으리로다.」라는 낙서를 해 놓았다 한다.

시인이 시 때문에 시적인 죽음을 당한 것이다.

정 철(鄭澈)이 강계에 귀양가 있을 때 이 동악 시단에서 술잔을 주고받던 이안눌과 권 필은 정철의 고독한 풍류를 사모하여, 그 멀리까지 찾아가 시회(詩會)로써 정철을 위로하였다 한다. 소위 원정 시회였던 것이다. 이때 정철은 이 두 젊은 시인을 보고, 「이 길에 천상의 두 적선(謫仙)을 얻어 보았다.」했다 한다.

그래서 동악 시단은 한국인 멋의 존재방식이요, 특유한 생활 형태의 증명이다. 그것은 감정의 오묘함으로 횡사를 뽑고 감정의 섬세함으로 종사를 뽑아 그 두 실가닥으로 감정을 교직하며 살았던, 그 잊어버린 소중한 것의 망실탑(忘失塔)이기도 하다.

  • 2005/05/15 00:50 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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