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051941

이규태의 <역사산책> - 광성진

광성진(廣城津)

「이 나라는 참 아름답소. 푸른 산과 푸른 계곡이 굽이지고 온갖 곡식이 풍요롭게 자라고 있소. 작은 초가집들이 상록수 숲속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어 당신을 불러다가 그 집에서 살고 싶은 맘 금할 수 없소.」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백 14년 전 신미년 6월, 결전을 마음먹고 손돌목을 지나 강화의 광성진(廣城津)을 바라보고 항해중인 미해군 대위 딜톤이 그의 아내에게 부친 편지 가운데 한 대목이다.

필자는 지금 그 6월에 그 푸른 산 푸른 계곡 상록수 속에 그때의 초가집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한미소전쟁(韓美小戰爭)의 고전장(古戰場)을 찾아간다. 이정표를 따라 곱게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달리니, 오른쪽으로 커다란 저수지 같은 바다와 접할 수 있었다. 구불구불 제법 높은 구릉을 몇 개 돌고 보니 멀리 높은 둔덕 위에 깨끗하게 바다와 접한 광성보(廣城堡)가 눈에 들어온다.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성책(城冊)과 문루가 파괴된 후 폐허가 된 것을 1977년 광성돈(廣城墩), 안해루(按海樓), 손돌목돈과 신미양요 때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쌍충비각(雙忠碑閣), 순국 무명용사비가 모두 보수 정화되어 있었다.

누각이 있던 자리에 안해루를 세웠고 포대의 옹성(壅城)이 남아 있던 곳에 광성돈이 둘레 150여 미터 정도 쌓아져 있었다. 그때 썼던 포도 전시되어 있다. 강 쪽으로 나 있는 네 개의 포문과 배수를 위한 시설을 예전대로 복구해 놓은 품이 옛 모습에 비길 수 없음에 조금은 서운함을 느낀다.

포대 주변에는 찔리면 사흘 동안 붓는다는 가시꽃풀이 무성했다. 이 포대에 질펀했을 한국 병사의 피가 그 꽃으로 피어났고, 그 원한이 꽃 끝에 가시를 돋게 했다고 구전된 고전장의 비가(悲歌)였다.

광성돈 위에 서니 대안에 손돌목이 보이고 포대 밑은 펄밭이었다. 그 포대 위에 턱을 괴고 앉아 1백여 년의 시간을 투시하여 한미 48시간 전쟁을 되뇌어 본다.

6월 11일 오전 10시 킴벌리 해병 중령의 하선 명령으로 상륙한 미 해병대는 세 갈래로 펄밭을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박격포를 질질 끌며 펄에 빠져 걷다가 더러는 열사에 졸도하기도 했다 한다.

이 포대는 강계병(江界兵)이 지키고 있었다. 포수들만 모은 특수부대인 것이다. 포대 복판에는 <수(帥)>자가 씌인 황색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후에 미해병이 노획한 이 중군기(中軍旗)를 사진으로 보았는데 가로세로 약 4미터 남짓의 거대한 깃발이었다.

펄밭을 벗어나 45미터 높이의 포대 비탈을 기어오르자 중군(中軍) 어재연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

「조선군의 포는 대부분 구경이 작고 사정거리가 짧은 데다 포의 몸통을 고정시키고 있어 일정한 장소에만 탄막을 칠 수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 탄막만 잘 피해 뚫고 들어가면 안전하다.」

미군은 8인치 포와 모노캐시호의 함포사격 그리고 휴대한 박격포로 공격하며 포대에 접근해 갔다. 포전 한시간 끝에 킴벌리 중령은 신호를 올려 함포 사격을 멎게 하고 돌격명령을 내렸다.

미국의 사학자 알버트 카스텔의 논문에 의하면 이 백병전(白兵戰)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미군은 장교들을 앞세워 고함을 지르며 황색기를 향해 돌진했다. 조선군은 대포와 소총으로 응사했으나 모두 미군 머리 위로 날아갈 뿐이었고 탄환과 포탄을 갈아 넣을 여유가 없었던지 소총을 집어던지고 칼과 창을 빼어든 채 성벽 위에 올라섰다. 그들은 소름끼치는 함성을 지르며 포대로 기어 올라오는 미군에게 바윗돌을 마냥 굴려 내렸다.」

지금 필자가 앉아 있는 이 자리를 두고 한미 양군은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썰물에 드러난 암초에다 어망을 치고 있던 어부가 포대 석축을 손쉽게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 어부처럼 선두에 선 미군 장교가 날쌔게 올라섰다. 포대 위에서 성 안은 완만하게 비탈져 있어 제걸음으로도 달려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 비탈을 달려가는 동안에 미군 장교가 사타구니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허벅지에 또 창이 꽂혔다.

이 장교가 바로 휴 맥키 해군 중위이며, 남북전쟁 후 미군 최초의 전사자이다.

미국 메릴랜드주(州)의 아나폴리스에 있는 미해군 사관학교 교회에 들어가 본 사람이면 다음과 같은 맥키 중위의 추념비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휴 맥키=”” 해군=”” 중위=”” 1844.=”” 4.=”” 23=”” 일생=”” 1871.=”” 6.=”” 11=”” 사망=”” 미해군=”” 아시아=”” 함대의=”” 장교로서=”” 한국=”” 강화도=”” 전투에서=”” 전사=””>

맥키 중위에 치명상을 입힌 한 강계병은 뒤쫓아 내려오는 윈필드 쉴리 소령의 왼쪽 소매를 꿰뚫었으나, 그 투창의 명수는 쉴리 소령이 쏜 권총을 맞고 쓰러졌다.

쉴리 소령은 후에 제독으로 승진, 미·스페인 전쟁의 명장으로 소문난 사람이다.

알버트 카스텔의 논문에서는 이 광성돈이 자리한 요새 안에서 벌어진 백병전을 다음과 같이 써놓고 있다.

「소총 개머리판 대(對) 창, 단검 대 장검의 결사적인 대결이었다. 조선군의 옷은 열세 겹으로 된 것이어서 총알이 잘 뚫고 나가지 못했기에 미군들은 총을 쏘는 대신 차라리 개머리판을 사용했다. 그런 조선군의 칼은 강철로 만든 미군의 단검과 부딪치면 곧 휘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한국 병사가 입었다던 열세 겹의 방탄복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대원군이 노심초사 끝에 만들어낸 방탄복이 실전에 쓰였던 것이다.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이란 문헌에 보면 대원군은 외구를 막기 위한 대수무비책(大修武備策)의 아이디어를 전국에 방을 붙여 모집했다. 이 방을 보고는 방방곡곡에서 기계기책(奇計奇策)을 들고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가운데 면포 열 겹을 포개어 만든 방탄포(防彈布)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양총(洋銃)을 쏘니 뚫고 나갔다. 세 겹을 더 보태어 열세 겹으로 포개자 총탄을 막아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열세 겹으로 방탄복을 만들어 이 한미소전쟁의 강계 포수병들에게 입혔던 것이다.

「조선군은 용감히 저항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조선군 사령관 어재연도 이때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일성록(日省錄)> 등 우리나라의 모든 사서에는 어 중군이 탄환을 맞고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논문에는 자결순절한 것으로 되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브라운 하사와 퍼비스 이병이 중군기인 <수>자 기를 꺾고 성조기를 이 포대에 올린 것은 12시 45분이었다.

이 포대 안에는 조선군의 시체와 부상자들의 열세 겹 방탄복이 불에 타고 있었다. 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으며 자결 못한 부상병들은 일부러 타는 불 속에 기어들어 자살을 기도했다. 이 처참한 광경을 보다 못한 한 미군 병사가 딜톤 대위에게 물었다. 신음하는 조선 병사를 사살해도 좋으냐고.

「안돼, 그건 인정이지만 살인이야. 괴롭겠지만 스스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 버려 둬.」

필자는 1백 십여 년 전 이 자리에서 타오르던 동포의 살냄새에 코를 씰룩씰룩하고 앉아 있다. 목에 칼을 대고 피를 뿜은 자결 병사들을 1백년이란 시공을 뚫고 투시하는데, 등살이 꿈틀하고 어느 부분인지 모르게 굵직한 것은 그들과 내 손에 흐른 피의 원형질에 동질의 분자가 섞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아주 지쳐 버렸소. 날씨는 변덕스럽게 비 아니면 바람과 안개의 연속이오. 정말 이젠 이곳이 싫어졌소.」

초가집에 살고 싶다던 딜톤 대위의 두 번째 편지 구절을 생각하며 필자는 포대의 연맥을 따라 산정에 오른다.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이며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아래 말끔히 다듬어진 무명 전망무사(戰亡武士)의 무덤인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아마 펄밭에서 자결한 병사나 포대에서 타 죽은 병사들을 이곳에 옮겨 매장했던 것을 역시 1977년 강화 전사유적(戰史遺蹟)을 보수하면서 담을 두르고 정성들여 정화해 놓은 것이다. 무심히 지날 곳이 아니라 고개 숙여 경건한 참배를 드린다. 누군가가 꽂아 놓았는지 상석 앞의 한줌 나리꽃이 시들시들했다. 누가 이름 없는 이 전망무사들 무덤에 꽃을 꽂았을까 하여 내려오는 길에 마을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서울 산다는 미국 소녀 몇이 꽂고 갔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미국인 학교에서는 반드시 이 고전장에 수학여행 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사는 미국인이나 여행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보고 그들 조상을 추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자는 그들의 체질화된 내셔널리즘에 숙연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적이었던 이 전망무사의 무덤에 꽂을 바치는 예쁘디 예쁜 박애주의에 나도 몰래 미소를 짓는다.

필자는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오며 주말을 이용, 이 고전장을 찾아오는 미국인 가족을 스칠 때마다 그들의 부러운 내셔널리즘에 고개를 숙였다.

  • 2005/06/05 19:41 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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