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092259
이규태의 <역사산책> - 강화성 남문
강화성 남문(江華城 南門)
땅벌같이 집요한 유태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통상을 거절하고 쇄국하는 대원군에게 악의를 품고는 사병을 거느리고 강화도 앞바다에 와 한강어귀를 못 찾아 방황하고 있었다. 한성을 침공하려고 방황하는 이 이양선(異樣船)에 낚싯배를 타고 접근하여 올라타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한국인이 있었다. 오페르트는 그의 기록에서 이 한국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 놓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한강 수로를 가르쳐주기 위해 왔다는 것이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그는 더욱더 말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나는 한성까지 겨우 50마일밖에 되지 않다는 것과 우리 배가 한성의 포구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는 고무적인 사실을 그로부터 알아낼 수 있었다.」
이 매국적인 언동을 그토록 가책없이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한국인이 그 밀고의 대가로 얻은 것이라곤 빈 술병과 금칠 태가 둘린 손거울이었다.
이렇게 해서 얻어간 그 거울을 그날 밤 그의 아내와 딸들, 그리고 마을 아낙네들이 서로 들여다보며 신기해했을 것이라고 교활한 오페르트는 적어놓고 있다. 그토록 신기한 것을 얻어올 수 있었던 그 추악한 한국인이 그 곁에서 마른기침을 하며 뽐내고 있었을 것도 상상할 수 있겠다.
오페르트의 한강 침입 소식을 접한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그 동안에 오페르트는 자기 말대로 <지극히 목가적인="" 강화의="" 언덕="">에서 한 개성 상인의 귀여운 아들의 손목을 잡고 유유히 산책하고 있었다. 또 조정과 장안에서는 이 유태인의 침입을 두고 노성(怒聲)이 충천하고 있는 그 동안에, 강화사람들은 이양선의 한 기관사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에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지극히>
또 이 이양선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한강의 상선들에게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있는 바로 그 동안에 이 이양선의 갑판 위에서는 구경왔던 한 뱃사공이 선장실에서 은스푼을 훔치다 들통이 나 법석대고 있었다. 분명히 무엇인가 이지러진 한국의 역사적 단면이 이 강화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프랑스 사제 아홉 명의 학살을 응징하고자 한국 출병을 준비하고 있던 중국 천진(天津)의 프랑스 함대는 의기양양했다. 안남(安南) 공략으로 안남왕을 굴복시켰고, 천진 공략으로 중국 황제를 굴복시켰던 프랑스 함대의 용장(勇將) 로즈 제독은 안하무인이었다.
「한 발의 포환으로 한성 민심을 서늘케 하고, 두 발의 포성으로 대원군의 무릎을 꿇리겠다.」고 호언을 한 로즈 제독은 1866년 9월 18일 지부(芝 )를 출항했다.
그 배는 대원군의 박해를 빠져 나온 젊은 리델 주교(主敎)와 세 명의 한국인이 물길잡이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자기 나라 사람을 죽인 데 격분하여 쳐들어오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침략당하는 나라 백성이 침략하는 함대의 길잡이를 하는 이 행위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아무리 능한 항해사일지언정 측량이나 해도가 되어 있지 않은 한강 수로를 찾아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어려운 한강 수로를 서슴없이 기어 들어가게 한 것이 바로 이 세 명의 한국인들이었다.
출발한 지 여드레 만에 서울 서강(西江) 나루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는 이 프랑스 함대에, 야음을 이용 낚싯배를 타고 접근해 간 수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말이 통하는 리델 주교와 밀회하고 귀엣말을 나누었다.
「몇 발의 대포소리에 성 안 인심은 상심(喪心)에 빠졌고 군대의 방비도 수백에 불과하오. 왕궁의 친위병도 5백이 채 못되니 수십 발의 포탄으로 왕궁을 위압하고 정예부대로 돌격을 시키면 대원군과 의관속대(衣冠束帶)의 장수와 재상들은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도망칠 것이오.」
조국의 사직에 포탄을 퍼붓길 갈망하는 그런 한국인의 행동을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강화 갑곶이 앞에 정박한 이 프랑스 함대가 작전 지연으로 양식조달에 긍긍하고 있을 때 이들에게 양식을 몰래 판 한국인이 있었다. 황해도(黃海道) 오우포(吾又浦)에 사는 문해룡(文海龍), 강여택(姜汝宅)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또 이의송(李義松), 이붕익(李鵬翼) 등은 비누나 빈 술병, 신문지, 단추 등의 완물(玩物)에 눈이 어두워 나라의 군정을 일러 바치고 대가로 그것들을 얻곤 하였다.
드디어 10월 16일 로즈 제독이 직접 지휘한 강화성 공격이 있었다. 강화성의 정문은 남문으로 약 2천 명의 수비군이 중군 양헌수(梁憲洙)의 지휘로 방어하고 있었다. 로즈 제독은 오스리 중령이 지휘하는 2개 중대와 협격을 시도하며 접근하였다.
지략이 뛰어난 양 중군은 적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남문루(南門樓)의 방어전투는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방비한 양 적에게 보임으로써 입성케 해놓고 집중 포화를 퍼부음으로써 격퇴시킬 모든 계획을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때문에 화력(火力)과 화약은 온통 남문루에 산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협격이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 함대 군영(軍營)으로 뛰어드는 백의(白衣)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한국인을 맞은 사람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아마도 종군 통역인 리델 주교였을 것이다. 그 한국인은 남문 작전을 밀고했고 그 밀고의 대가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아무튼 강화성을 지키는 색다른 작전은 이 백의의 그림자에 의해 탄로가 났고 로즈 제독은 작전을 바꿔 모든 화력을 화약이 산적되어 있다는 남문루에 집중시켰다. 문루는 자폭력이 가중되어 날아가 버렸고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중군 병력은 정족산(鼎足山) 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적군과 통모한 죄로 최 수(崔燧), 김인길(金仁吉), 김 진(金振), 김진구(金鎭九) 등 네 명이 효수되었고, 또 별도로 김중응(金重應)이란 자가 프랑스군과 내응(內應)한 죄로 효수되었다. 또 따로 프랑스군과 통모한 증거로 이용래(李龍來), 원후정(元厚正), 박성운(朴聖云) 등이 잡혀 군민 앞에서 효수당했다. 그러나 그중 누가 이 남문 작전의 비밀을 누설했는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통모로 강화읍민 3분의 2가 참학을 당했고 이궁(離宮)인 장녕전(長寧殿)과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그 역사적인 객사 공해(公 )는 다 타고 겨우 이위정당(貳衛政堂) 세 칸만이 남게 되었다. 민가는 태반이 소실되었고 동문(東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남문의 문루와 현판과 여장(女墻)은 사라지고 석문만 덜렁 남았다. 그리고 남문루에 걸렸던 커다란 강화동종은 프랑스군이 1백여 명의 군졸로 하여금 함대로 운반해 가려 했으나, 선적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도중에 버렸다 한다. 그들은 그것을 천주교도 학살 복수의 기념물로 로마 교황청에 선물하려 했던 것이다.
지금 필자는 그 남문 앞에 서 있다. 문루가 프랑스군이 폭파시킨 지 1백여 년 만인 1976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정화사업으로 새로 복원되어 단청이 눈부셨다. 현판도 그 예전대로였다. 필자가 눈 가장자리를 잔뜩 조이고 지금 이 문루를 올려다보는 뜻은 한국인의 이 매국적 체질이 투영된 어떤 상황의 초점을 이 문루에서 잡아보고자 함이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손거울 하나 빈 술병 하나에 눈이 어두워 매국을 하고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이 어떤 전통적 정신 체질을 두고, 오늘을 사는 세대는 오장이 다 녹도록 속을 썩여가면서라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유전되어 있는 그런 마이너스 가치의 피, 그 더러운 피를 뽑아서 더럽혀진 남문의 오욕을 씻어야 한다. 문루를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어느 부위인지 자꾸만 가려워 오는 것은 분명히 그 치부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로마 교황청에서나 보았을 남문의 강화동종은 원래의 자리인 구남문 터에 있던 것을 1977년 고려 궁터를 보수 정화하면서 궁터 내로 옮겨져 보존되어 있었다.
이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민족적 정신 전통에 반성을 할 수 있도록 그 종소리를 들었으면 한다. 에밀레의 종소리나 성불사(成佛寺)의 종소리와는 다른 내셔널리즘의 메아리를 그 종에서 들을 수 있어야겠다.
- 2005/06/09 22:59 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