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031830
이규태의 <역사산책> - 지지대비
지지대비(遲遲臺碑)
조선왕조의 역대 왕비 중에 그 인간 상황이 처절했던 왕비로는 단종비(端宗妃) 송씨와 장조비(莊祖妃) 혜경궁 홍씨를 들 수 있다. 송씨는 과거한(過去恨)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이었다면, 홍씨는 현재한(現在恨)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홍씨의 그 상황은 한결 가혹했다.
시아버지 영조의 괴벽과 남편 사도세자의 괴벽 틈에서 또 그 부자간의 증오와 갈등 틈에서 살다가 끝내는 당파의 소용돌이에 말려 뒤주 속에서 남편이 굶어 죽는 것을 살아서 지켜보아야 했다. 이같은 그녀의 인간 상황은 그녀가 써 남겼듯이 「눈물이 말라 이제 슬프면 눈이 아플」지경으로 처절했던 것이다.
정조는 이 비극을 공감했기 때문에 거의 병적일 만큼 효도에 몰두했다. 정조 19년인 1795년 음력 2월은 홍씨의 환갑이었다.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화성의 원소(園所)에서 베풀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감상적인 대단한 잔치였다.
이 잔치 구경을 하고자 팔도에서 사람이 모여들었고, 이희평(李羲平)이라는 선비도 베옷을 입고 이 성사를 구경하고자 특별히 가설된 노량진의 배다리(船橋)를 건넌다.
금천(衿川)이란 고을 이름을 시흥으란 희망적인 이름으로 고친 것도 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화성으로 옮기고 그 능행을 위해 그곳에 행궁을 지은 후부터였다. 곧 정조의 효심과 시흥은 함수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희평이 그 시흥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 새로 축성한 화성성 안을 들어선다. 그는 화성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을 보고 「2층 문루가 반공(半空)에 솟은 품이 서울의 남대문과 같고 홍예 높기는 남대문보다 더 높더라」했다.
6.25사변에 폐허가 되었던 이 장안문은 근간에 말끔히 복원되어 이희평이 보았던 그대로를 볼 수가 있었다.
이튿날인 2월 10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유의(油衣)를 입은 마병(馬兵)의 사열을 받으며 정조의 어가(御駕)가 화성문 안에 들어섰다.
황금 갑주(黃金甲胄)의 무복 차림의 임금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어 임금의 자궁(慈宮) 가마가 잇따랐는데 내의녀(內醫女)와 궁기들이 전모를 쓰고 쌍쌍이 앞서고 상궁과 내인도 역시 쌍쌍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 비극의 자당(慈堂)이 탄 가마는 사면에 주렴을 드리우고, 그 위를 기름 차일로 덮어 비를 막고 있었다.
이희평이 적은 바에 의하면 지금 수원이 들어서 있는 팔달산(八達山) 밑은 본래 세류원(細流院)의 주막이었던 자리로 정조가 아버지의 묘를 옮긴 후에 완벽한 도시계획에 의해 세워진 새 도시라 했다.
정조는 서울을 이 화성에 옮길 생각으로 그 행궁이며 축성을 완벽하게 했다고 하나, 천도를 시도했다는 뚜렷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것을 입증할 만한 방증은 있다.
팔달산을 풍수의 주산으로 하고 그에 맞추어 행궁을 지었는데, 행궁 정문인 삼문 문루(三門門樓)를 신풍루(新豊樓)라 이름 지은 것도 그중 하나다. 신풍루는 서한(西漢)나라 고제(高帝)가 장안에 도읍을 새로 정하고 인근 풍(豊)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킴으로써 도읍이 번창했다해서 그 이름을 붙였다. 곧 수원을 도읍으로 삼고 싶은 의사가 북문인 장안문과 행궁인 신풍루란 이름에서 완연하다.
11일에는 자당의 환갑을 기념하는 알성(謁聖)의 문무과 시험을 베풀고 그날로 방을 붙였다. 문무 장원이 무동(舞童)과 선락(仙樂)을 앞세워 유가(遊歌)를 했다.
12일엔 자당을 모시고 남문인 팔달문을 거쳐 20리 밖의 화산 능원(花山陵園)에 행차를 했다. 능원에서 환갑 의례를 마치고 돌아온 정조는 갑주무복(甲胄武服)으로 갈아입고 팔달산 제 1봉에 세워진 장대(將臺)에 올랐다.
「2층 누각이 표묘( )하여 공중에 솟았으니 아래에서 치밀어보니 백운이 허리를 두르고, 단청이 눈부시니 신선의 누대(樓臺)러라. 모양은 남한산성의 서장대와 같고 광활하기는 그보다 낫더라.」
정조는 그 장대에 앉아 영의정 이하 문무백관의 군례(軍禮)를 받으며 저녁 수라를 들었다. 수라를 들자 대상(臺上)에서 대포를 쏘고, 천아성(天鵝聲)이라는 팡파르가 울려퍼지면 청룡기(靑龍旗)와 청룡등(靑龍燈)을 동쪽으로 내건다. 그러면 이 청룡등의 불빛을 보고 멀리 동문에 있는 군사들이 응포를 하니 대에 있던 군사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이같이 주작기(朱雀旗)와 주작등을 남쪽에 내걸어 남문의 응포가 있으면 함성을 지르고, 백호기(白虎旗)와 백호등을 서쪽에, 현무기(玄武旗)와 현무등을 북쪽에 내걸고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대상에 불꽃탄인 신기전(神機箭)을 놓자 화성 사대문과 성벽을 따라 삼두화(三頭火) 횃불이 일제히 타올랐다. 이를 신호로 신기전의 불꽃이 화성 하늘을 종횡으로 누볐다.
「사면이 모두 화경(火景)이라 구경하는 인파로 길이 꽉 차 내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불빛이 대낮 같으니 그런 장관이 또 다시 어이 있으리오.」
이같이 환갑의 전야 축제가 삼경(三更)까지 계속되고 이튿날인 13일에는 행궁 안에서 다시 잔치가 벌어졌다.
임금과 자당이 앉은 앞과 등받이에는 홍도화(紅桃花) 등 삼색 도화로 종이꽃을 꾸며 꽂고 차일대에도 꽃을 묶어 잔치 마당을 온통 꽃으로 에워쌌다.
그 꽃 가운데 사람 꽃인 기생 50명이 누른 사(紗) 관대에 수(袖)는 초록 곁마기요, 남치마 앞에 진홍 휘건(揮巾)을 두르고, 관대 앞에 <강구연월(康衢煙月)> <태평만수(泰平萬壽)>라고 수 놓고, 진홍의 넓은 띠에 수복(壽福)을 수놓아 화관을 썼는데 오색 채화로 얽였더라 했다.
백관이 참례하면 임금이 꽃 한 가지씩을 나누에 주는데 각각 큰절을 하고 받아서 갓 위에 꽂으니 온통 꽃잔치다. 상에 올린 그릇마다 꽃을 꽂았고 순배(巡杯)하는 기생의 손에도 꽃이라…
그런 중에서 뮤지컬이 시작된다. 연화대(蓮花臺)에 놓인 큰 연꽃을 학으로 변장한 기생이 부리로 쫀다. 연잎이 조금씩 벌어지며 그 속에서 연꽃잎을 쓰고 안개옷을 입은 아이 하나가 나와 생황( 簧)을 부니 이에 맞춰 기생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돈다. 순배가 일곱 차례 돌고 어제칠률(御題七律)을 내리고 차운(次韻) 절차에 들어간다.
이같이 잔치를 끝내고 14일에는 화성의 노인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베푼다. 그리고 새를 그린 지팡이에 비단 수건을 감은 장수장(長壽杖) 한 개씩과 백수주(白水紬) 한 필씩을 노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
그 이튿날인 15일에는 서울로 환궁하는데, 배웅은 용주사(龍珠寺)의 승군이 맡았다. 찬란한 기치와 승군복을 입고 시흥까지 뒤따라 나가는 품이 또한 장관이었다.
이 돌아오는 행차 때마다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곳이 지금 지지대(遲遲臺)로 이름난 고개 마루에서였다.
지금은 경수 국도(京水國道)가 가로질러 고갯길을 많이 낮추어 놓았지만 옛날에는 시흥에서 수원으로 넘어가는 가장 험한 고갯길이었다.
임금이 이 고개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지쳐서도 아니요, 또 교군꾼의 피로를 덜어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고개 마루에서 아버지 무덤이 있는 화산이 멀리 바라다보이기 때문이다. 그 고개를 넘어서면 그 화산의 시계에서 떠나간다는 그런 감상도 작용했을 것이다.
교군꾼을 더디 걷게 하고 머뭇거리며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던 이 고갯길, 그래서 지지대란 고개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정조가 승하한 지 8년 후인 1807년 섣달에 화성 향리인 신 현(申絢)이 정조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순조에게 비석 세우기를 청한다. 그래서 지금의 지지대 비가 그 고개 마루에 서게 된 것이다.
이 환갑연을 구경하고 <화성일기(華城日記)>를 써 남긴 이희평은 때마침 한식날을 맞아 그의 선조 묘에 성묘하기 위해 시흥에서 판교 쪽으로 넘어가는 추현(秋峴) 고개를 밤중에 넘는다. 추현 고개 주막에 들자 주모가 반기며 말한다.
「어디서 오시는 행차인지, 그 험한 고개를 넘어 무사히 오셨습니다. 석양 후엔 호환(虎患)으로 행인이 못 다니는데 거룩하신 행차입니다.」
이희평은 그런 줄 모르고 넘어왔으나 「두 번은 못 올 길이니 후인은 경계할지어다」하고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어제는 화려한 환갑연의 풍류가 찬연히 보여 그리 좋았는데, 오늘은 이리 고초하여 위험한 데를 지나오게 되다니 세상 일이 매양 이러한 것이라 내 웃고 말하니라.」그는 이렇게 일기를 맺고 있다.
- 2005/07/03 18:30 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