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082319

이규태의 <역사산책> - 향적봉

향적봉(香積峰)

구천동 백련사에서 덕유산길로 올라가면 오수좌굴이라는 커다란 자연 동굴이 나타난다.

집 한 채가 들어앉을 만한 동굴이기에 옛날에는 선방(禪房)을 들여 백련사의 말사(末寺) 구실을 했던 것 같다.

명종 7년(1552년)에, 광주목사를 역임한 임 훈은 이 굴을 보고 이렇게 적고 있다.

「일러 계조굴(戒祖窟)이라 하는데 백암(白岩)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큰집 한 채가 들어앉을 만한 석굴로 계조란 스님이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 것 같다.」

이로 보아 굴의 본 이름이 계조굴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임 훈이 찾아갔을 때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빈 굴이었던 같다.

한데 그 1백 20년 후인 1672년 윤 증이 덕유산을 등반했을 때는 이 굴에 맹인 스님이 많은 제자들에게 불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했다.

시로 된 그의 <유려산행기(遊廬山行記)>에 보면 이 굴 이름은 계주굴(戒珠窟)이라 하고 「가련하다, 한 장님이 많은 장님을 이끌고 있으니, 신고(辛苦)가 서로 따라 유굴(幽窟)에 뚝뚝 떨어지는도다」하였다. 그리고 끝부분에 부연하기를 「월산인(月山人) 계주란 여든된 노인이 제자들을 모아 경을 가르치고 있다」했다.

이 굴 이름이 이 노맹의 이름을 따라 붙은 것처럼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여기에 의혹이 가는 것은 1백 20년 전 임 훈이 이 굴을 이미 계조굴이라 적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윤 증이 혹시 잘못 적은 것이 아닌가 싶다. 계조와 계주는 비슷한 음인 점으로 이 노맹이 자기가 득도한 굴 이름을 자신의 법명으로 삼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호를 아호나 법명으로 삼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노맹이 가르치고 있었다는 <중맹(衆盲)>이 그 어휘의 뜻대로 모두 장님들이었던가, 또는 깨치지 않은 중생이란 뜻에서 추상적으로 중맹이라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높은 산중턱에서 한 노맹도사가 고고히 앉아 경을 가르치고 있는 경지를 환상 속에 재생시켜 볼 때 어딘지 마음 한구석이 짜릿하게 아리도록 측은함을 느낀다.

만약 중맹이 장님이었다면 그들 소외당한 아웃사이더적인 마음의 매듭매듭을 이 산중 굴 속에서 도통한 노맹에 의해 풀어보고 있는 이 경지가 또한 눈물겹도록 멋있기도 하다.

윤 증은 이들 신고가 유굴에서 뚝뚝 떨어진다고 구상화했지만 필자는 지금 그들 신고가 마음속에서 구름처럼 풀어 버리는 추상화의 경지를 정지해 본다.

이 계조굴에서 윤 증은 여든 노맹이 권하는 다(茶)로 목을 축였으니 그 또한 선경을 그린 담담한 수묵화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듬더듬 타주는 그 다 빛깔이 앵도처럼 붉고 꿀을 타서 맛이 좋았다」했으니, 이 산에서 나는 특수한 열매차였을 것이다. 「청신한 뒷맛이 경옥고만 못하지 않으니 마시자 곧 지친 몸이 불에 물 끼얹은 듯 사라진다」했으니, 그 다가 무슨 다인지 부럽기만 하다. 이 계조굴에는 이같이 스님이 살기도 하고 도사가 살기도 하고 또 오랫동안 비워 두기도 하다가 근년에 오수좌라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오수좌굴로 통칭되고 있다. 그래서 계조라는 이름은 문헌에만 남아 있다.

「여기를 떠나 가파른 산봉우리 길을 올려보니,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여 두 다리가 미리부터 아파온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헐떡이는 숨을 누르며 쉬엄쉬엄 올라가니 심산이라 잡목은 없고 노회목(老檜木) 잣나무만이 하늘을 가려 빽빽하다.」윤 증은 이렇게 산을 오르는 과정마다 시로 읊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노회목 잣나무는 없고 잡목만이 무성하다. 그러나 미리부터 다리가 아파오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숨을 헐떡이는 건 매한가지다.

「오미자 향기가 사람의 코를 찌르는데 이 산에 본래 칡이 없다더니 과연 그렇다」했는데 오미자 향기를 맡기에는 공해에 썩어 버린 취각 때문인지 코를 찌를 만한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고, 역시 듣던 대로 칡덩굴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다.

덕유산에 칡이 없는 이유로 구전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징악(懲惡) 패턴의 설화이다.

옛날 이 산 두메에 가난한 형제가 살았었다. 그런데 형이 장님이었기에 동생이 매일같이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어 칡죽으로 연명했다.

한데 장님 형은 동생이 칡죽을 끓여 저만 많이 먹고 자기에게는 먹다 남은 것만 주는 걸로 의심을 했다. 사실 동생은 형을 먼저 먹이고 나머지를 먹어 왔었다.

이 의혹을 가눌 길 없었던 형은 어느 날 동생을 쇠스랑으로 찍어 죽였다. 그런데 죽어서 소쩍새가 된 아우는 그래도 눈먼 형이 굶어죽을까 봐 칡이 있는 나무에 앉아 소쩍소쩍 울어, 눈먼 형에게 칡이 있는 곳을 인도해 주었다.

그러나 형이 칡에 손을 대기만 하면 칡이 녹아 흘러 버리는 것이었다. 형은 소쩍새를 따라 온 산을 헤맸으나 칡은 번번이 녹아 흐르고 드디어는 온 산의 칡이 모두 녹아 흐른 다음 형은 굶어죽었다 한다. 그래서 덕유산에는 칡의 씨가 말라 버렸고 칡뿌리가 영그는 철이면 소쩍새만이 구슬프게 운다 한다.

불신(不信)의 응보가 한 산의 칡씨를 말려 놓은 것이다. 옛 사람들은 이만한 설화 하나로도 불신의 해독에 교화를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의 불신은 덕유산뿐만 아니라 팔도의 칡을 말려도 사라질 것 같지 않게끔 고질화됐음에랴. 이제 소쩍새도 그만 울고 칡도 돋아날 때가 되었겠건만 이 불신의 고질화 때문에 덕유산의 칡에 얽힌 저항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다.

이미 3백여 년 전에 윤 증이 올라왔을 때도 퇴락되었다던 덕유산의 가장 높은 절인 향적암(香積庵) 터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다만 주봉인 향적봉으로부터 약 3백 미터 아래 지점에 샘물이 나고 주변이 펀펀한 것으로 미루어 그곳이 암 터가 아닌가 가늠할 따름이다.

임 훈의 기록을 보면 향적암 서쪽에 향나무 숲이 즐비하였다 하여 그쪽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더니 드문드문 몇 그루 남아 있었다.

밑둥이 두어 아름에 이른다 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름으로 잴 수 없고 두서너 뼘밖에 안되는 빈약한 것들뿐이다.

임 훈은 안내승에게 향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왜 나무 밑둥에서는 향기가 나는데 지엽(枝葉)에는 향기가 없습니까.」

그런데 그 안내승의 대답이 철학적이다.

「미륵불이 이 세상에 재림할 때 비로소 지엽에서도 향내가 날 겁니다.」

윤 증은 소망의 향적봉 정상 암봉에 의지하여 사방을 바라보며 <불교의 소천하(小天下)같은=””> 시야를 훑어본다. 왼쪽에 가야산, 오른쪽에 둔악산(芚岳山), 그리고 멀리 남쪽의 지리산을 본다.

필자도 이 정상에서 왼쪽의 가야산을 보고 둔악산을 오른쪽에 보는 바위에 기대어 멀리 지리산을 감지하려 하는데 원천(遠天)이 흐려 구름인가 지리산인가 분간할 길이 없다. 올라와서 보니 20여 년 전의 이 덕유산 일대 3천만 평의 소유권 소송 사건이 생각났다.

순조가 참판 이호일(李鎬一)에게 이 덕유산 일대의 산을 하사하였다고 그의 후손이 그 문증(文證)을 첨부하여 소유권 확인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 문증 가운데는 어명에 따라 무주부사 한백연(韓百衍)이 그 한계를 정해 주는 확인서가 있었다. 「덕유산정에서 네 눈 닿는 곳은 모두 네 땅이다」라는 어명의 지적표시를 위해 무주부사는 이 향적봉에 오른다. 오른쪽에는 칠봉괘방치(七峯掛榜峙), 왼편에는 거음치(巨音峙), 조치(鳥峙), 치마(馳馬)에 이르는 무주·적상(赤裳)·안성(安城)·설천(雪川)·무풍(茂豊) 4개 면 8개 리에 펼쳐진 3천만 평이라는 엄청난 땅을 이 참판에게 주었던 것이다. 물론 국유지화된 후이기에 소송의 귀추는 뻔하지만 이 향적봉에 올라서서 보니 「네 눈 닿는 곳은 모두 네 땅이다」라는 감정적이고 낭만적인 포상(褒賞)의 멋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윤 증이 읊었듯이 5월에 나뭇잎이 두어 개 돋고 7월에 서리가 내리고 9월에 눈이 내린다던 향적봉이다.

하루 이틀 새 눈이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산길을 더듬는다.

  • 2005/08/08 23:19 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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