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141049
이규태의 <역사산책> - 무등산 김덕령사당
무등산(無等山)의 김덕령사당(金德齡祠堂)
충효리(忠孝里)는 김덕령(金德齡) 장군이 태어난 마을이다. 그 마을에 있는 취가정(醉歌亭)은 김 장군이 나뭇짐 벗어 놓고 취시가(醉時歌)를 읊었던 옛 터이다. 석저산(石底山) 두메의 성안이란 골짝은 김 장군이 뛰어 놀던 놀이터요, 바위 하나 널펀하게 내민 것은 김 장군이 낚시를 드리웠던 조대(釣臺)라 한다. 무등산(無等山) 문(門)바위는 김 장군의 과녁이요, 의상대 뒷줄기 칼등같이 내려온 주검(鑄劍) 등은 김 장군이 칼을 굽던 대장간이 있던 자리이며, 정상의 입석대(立石臺)는 김 장군이 들어서 세우고 발로 차 누인 것이라 한다.
<너덜> <너덜겅>하는 골짝 지명들은 김 장군이 굴렸던 그 바위 구르는 소리를 딴 것이라 한다. 무등산에 있는 것은 비록 그것이 한아름 바윗덩이요, 한줌의 풀일지라도 김덕령 장군과 연결하지 않으면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 같아 그 이름을 붙잡고 늘어진다. 이 전설의 현장들을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곳 주민들이 예외없이 「덕령이 미역 감던 데!」 「덕령이 말 몰던 데!」 「덕령이 낙상했던 바위!」라며 마치 제 손자 이름 부르듯이 덕령이 덕령이 한다는 것이다.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 민족적 영웅에 대해 불손한 호칭임이 분명한데 웬지 불손하다는 생각보다 친근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은 단지 그의 선조들이 그렇게 불렀기에 그들도 그렇게 부를 따름이며 <김덕령 장군="">, <김 충장공=""> 하면 어쩐지 그들이 알고 있는 친근한 덕령이가 아닌 것 같다고 고개를 흔든다. 옳거니 필자 굳이 그 이유를 따져 묻지 않겠다. 사람이 잘나면 나라를 위해 잘났다든지 역사를 위해, 문명을 위해, 부모를 위해 잘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덕령이>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이순신 장군더러 <순신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민중의 공감력에서 잘난 사람이면 <덕령이>하는 식의 부름이 가능한 것이다. 비록 그분이 나라를 위해 잘났다손 치더라도 어떤 요인으로 민중의 공감력과 연결된다면 그런 정다운 호칭이 가능한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비범은 항상 비운이었으며 이같은 비운은 항상 민중의 공감력과 연결이 된다. 그런 전형적인 일생을 김덕령이 살다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 석저촌(光州石底村) 사람인 김덕령은 용맹이 뛰어나서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 잡아서 그 고기를 찢어 앉은 자리에서 다 먹기도 하고, 말을 타고 달려서 작은 창문으로 단간방에 뛰어 들어가 곧 말을 돌려서 뛰어나오기도 하며, 다락지붕 위에 올라가 옆으로 누워 굴러서 청하를 타고 떨어져서 다락 안에 들어가기도 한다.」 (名臣錄) 이처럼 김덕령은 소년 때부터 날랬기에 남도에서는 사나운 말을 잡아다가 길들일 때는 그를 불러갔다 한다. 그가 임란에 임전했을 때 항상 철퇴 두 개를 양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근이나 되었으니 팔도에서 신장(神將)으로 소문이 날 만도 했다. 왜장 가또오 기요사마(加藤淸正)는 그 명성을 듣고 몰래 화공을 보내어 그 얼굴을 그리게 하였다. 그림을 본 그는 「참 장군이다」라며 항상 경계했으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기뻐하며, 「이제 양호(兩湖)는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한다. (亂中雜錄) 그의 신비한 용맹이 팔도에 퍼지자 조정에서는 반란자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했다고 음모를 꾸며 정치적 살인을 하였다. 그는 스무엿새 동안 형장(刑杖)을 맞아 정강이뼈가 부러졌으나 무릎으로 걸어다녔으며, 그가 노하여 몸을 솟구치면 쇠사슬이 끊어졌다 한다. 그리고 옥문을 나올 때에는 그의 용력을 두려워하여 통나무로 우리를 만들어 씌웠다 한다. 당시 김덕령 장군 다음으로 용맹을 날렸던 권인용(權仁龍)도 죄없이 역적으로 몰아 옥사시켰고, 그 장했던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도 유배하였다. 임진국난에 충성을 다한 명(名)의병장들을 조정에서 이같이 무고롤 얽어 숙청하였음은 이들의 명세에 조정이 정치적 압력을 받았던데서 감행한 정치숙청이었던 것이다. 역사에서 민중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극한적이고 가혹한 상황의 죽음은 죽은 후에도 민중의 동정 속에 영생한다는 것이 한국적 휴머니즘의 개성 있는 전통이었다.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민중의 토속신앙 대상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모두 이 민중의 휴머니즘 속에 살아 있는 원한의 주인공들이었다. 비운에 쓰러진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 신하에게 살해당한 한많은 임금 공민왕(恭愍王), 고려사직을 지키려는 충정 때문에 이성계에 의해 모살당한 최 영 장군, 명성과 용맹 때문에 약관에 형살당한 남 이 장군, 역신(逆臣) 김자점(金自點)의 모함으로 살해당한 임경업 장군, 세조정난으로 젊은 나이에 노비가 되었던 비운의 단종비 송씨부인, 그리고 김덕령 장군 등이 바로 그 토속신으로 좌정하여 불의의 전통에 침묵과 저항을 계속해 온 것이다. 덕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전통이야말로 손이 시리도록 소중한 전통적 민중 휴머니즘의 근간을 어루만지는 촉감의 그런 희열이 아닐 수 없다. 20여 년 전 휴전선을 돌아보았을 때 장단(長湍) 땅 두메산골에서 당집 하나를 보았는데, 그 속에 <허씨신(許氏神)>이라는 조그마한 돌로 만든 비를 본 일이 있었다. 그 후 문헌을 뒤지다 보니 <주영편(晝永編)>에 이 토속신이 된 허씨의 이야기가 적혀 있음을 보았다. 그때 필자의 몸에 유전된 전통적 원형질들이 따끔따끔하게 자극을 받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허씨가 열녀나 효부가 아닌 평범한 어머니였다는 점에서 더욱 강렬했다. 그는 누구의 부인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어린 아들을 잃고 시를 한수 남긴 촌부일 뿐이다. 그 시는 작품으로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민중 휴머니즘에 폭넓은 공명(共鳴)을 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만한 공명만으로도 한국의 서민은 허씨신이란 한국적 휴머니즘의 도표를 세울 수 있는 그런 다감한 민족이다. 여덟 살에 일곱 해를 병들었으니 돌아가 눕는 것이 너는 아마 편하리라, 가엾다, 눈 내리는 밤에 어미를 떠나서도 추운 줄 모르는구나. 그 시가 쉴러의 명시 <죽은 자식을="" 그리는="" 노래="">보다 더 흉금을 울리는 것은 내 안에 깃든 전통적 원형질 때문일 것이다. 또 필자는 그 무렵 무안(務安)의 바닷가에서 물 속으로 드러난 돌산에서 당집 하나를 보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광녀비(狂女碑)라 씌인 밤나무 신주가 들어 있었다. 필자는 이 광녀 이야기를 문헌에서 보고 한국인이 처할 수 있는 극한 상황의 그 극을 보는 듯해 섬뜩했다. 그녀의 열두 살 난 지립(之立)과 열 살 난 지발(之發), 두 아들은 왜적이 쳐들고 있는 작두의 칼날 아래 목을 나란히 하고 눈을 멀뚱거리고 있다. 비단 지립과 지발이 아니라도 좋다. 두 형제가 그렇게 인질로 잡혀 칼날을 목에 대고 있는데, 그 네 개의 눈을 곡간에 숨어서 보고 있는 어머니의 개연성을 자기 상황으로 삼아보면 알 것이다. 무안 선비 윤 기(尹起)의 젊은 아내인 이 배씨는 제발로 걸어나가 왜적에게 겁탈을 당하면 두 아들이 살고, 숨은 채 버티고 있으면 두 아들의 목이 작두에 동강나는 택일의 고된 시련에 놓인 것이다. 라시느의 비극에서는 헬렌적[情的]인 것과 헤브류적[理的)인 것의 택일을 둔 이같은 갈등이 곧잘 소재가 됐었다. 그러나 배씨가 처하고 있는 상황은 무대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결국 한국의 어머니 배씨는 더없이 소중한 두 아들(헬렌)의 목을 작두날에 나뒹굴게 하고 정절(헤브류)를 택하였다. 죽은 아들의 간을 꺼내어 나무에 걸어놓고 가는 그 처절한 행패를 보면서까지 정절을 지키게끔 한국 여인에게 강요한 그 가치관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배씨는 정려 열녀(旌閭烈女)라는 명예 밑에서 휴머니즘을 살해해 온 그 가치관 아래에서 발광을 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의 어머니는 그 상황 아래에서 발광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헬렌적인 저항이요 휴머니즘의 반동이었다. 그리하여 배씨는 절벽 위에서 발광 끝에 떨어져 죽었으며 그곳에 지금 신으로 좌정한 것이다. 이 배씨를 신으로 좌정시킨 것은 그녀가 두 아들을 희생하고 정절을 구제한 때문도 아니요, 또 정려 열녀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헬렌적 저항과 휴머니즘의 반동이 민중에게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필자가 <덕령이>를 모신 우람한 무등산 아래 충장사(忠壯祠)를 돌아보면서, 이 사우(祠宇)가 다른 많은 충렬사(忠烈祠)와는 다른 무엇을 느끼는 것은 이 김 장군에게 깃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8년 사는 동안 7년 앓다 죽은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나 도덕에 미친 광녀에 공감하듯 그런 민중적인 친근감이다. 그리고 최 영이나 남 이나 임경업에 부치는 민중적인 공분(共分)이다. 충장사에는 무덤을 이장하면서 관과 부장품인 솜옷, 홑이불 등을 꺼내어 사 안에 전시해 두고 있었는데 관을 보니 겨우 5척 남짓하였다. 김 장군은 무척 단구였던 것 같다. 그 단구에 백근 철퇴를 양 허리에 차고 다니는 힘찬 기개가 한국의 민중 휴머니즘에 훈훈하게 복합되어서 암암하게 필자의 뇌리에 투영되고 있다. - 2005/08/14 10:49 에 작성 덕령이>죽은>덕령이>순신이>덕령이>김>김덕령>너덜겅>너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