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292311
이규태의 <역사산책> - 사명당비
사명당비(四溟堂碑)
경술년 하면 한일합방의 국치를 생각하게 된다. 이미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진 후부터 항간에는 오경(五庚) 후에 홍제존자(弘濟尊者)가 곡을 한다는 참언이 널리 퍼졌었다고 당시 신문들이 보도했었다. 이 말은 일본에게 나라를 먹힌다는 뜻이라고만 암시했을 뿐 왜 그 글 뜻이 망국을 예언하는 것인가는 풀이해 놓지 않아 궁금해 했다.
한데 필자 기금 가야산의 한 암자 곁에 네 동강이 난 사명당(四溟堂)의 비석을 읽어내리다가 그 참언의 글 뜻을 이 비명이 풀이해 주었기에 무릎을 친다.
이 비명에는 <자통홍제존자 사명대사석장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石藏碑)=”“>라 되어 있었다. 홍제존자란 바로 사명대사를 뜻한 것을 알겠고, 그 사명대사가 통곡을 할 시기로 보이는 <오경>의 연유를 살피고자 비명을 읽어내렸다. 끝부분에 그의 죽음의 현장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었다.오경>
「광해군 2년 가을에 임금이 염려하여 서울에 와서 병을 낫게 하려고 수령으로 하여금 상경하도록 했는데, 스님은 8월 26일에 대중을 모아 놓고 사대(四大 : 地·水·火·風)가 모두어 이룩된 이 몸이 장차 진원(眞源)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부질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이 허깨비 몸을 수고롭게 하리오, 내가 이제 입적하려 한다 하고 가부좌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해인 광해군 2년은 1610년으로 경술년이었다. 경술국치보다 꼭 3백년 전이요, 오경술(五庚戌) 전이었다. 사명당이 입적한 지 오경 후란 바로 국치가 이루어진 해에 해당된다. 역사 속에는 많은 인물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 상명당으로 하여금 국치를 통곡케 했을까. 그런 민중심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비단 국치를 예언하는 민중심리의 진원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관계된 참언은 모두 이 비석에 연유되었던 것 같다. 일제말에도 사명당 비석에서 소리가 난다는 참언이 나돌았었다. 이것은 영남 민중들에게 아련한 희망을 안겨 주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1943년, 당시 일본인 합천경찰서장은 민심 소란을 이유로 이 일본 패망을 예언한 사명당 비를 네 조각내어 길에다 버리는 참변을 자행했다. 곡 비석이 조각나는 처형을 받은 것이다. 참언은 민중심리의 공감을 집약시킨 공약수다. 사명당 비가 이 공감을 집약시킨 공약수가 된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그의 일생이 배일로 일관됐고 일본에 고자세로 임한 일화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다. 비명의 후반에도 그런 많은 일화 가운데 하나가 적혀 있었다.
선조 27년 봄에 명나라 원병장 유 정(劉綎)의 부탁으로 사명당은 부산의 왜병영에 세 번이나 들어가서 왜장 가또오를 달래면서 적진의 허실을 염탐했다.
가또오가 사명당에게 물었다.
「조선에 보배가 있습니까?」
사명당이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오히려 보배는 일본에 있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하고 있으니, 보배는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또오는 깜짝 놀라면서 한탄하였다.
<지봉유설>에 보면 가또오가 사명당에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하니, 사명당은 「우리나라에서 네 머리를 금 천근과 만호되는 고을을 봉하여 주겠다고 현상하니 그것이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대답하자 가또오는 크게 웃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 속담에 추운 방을 일컬어 「사명당의 사처방이냐」라는 것이 있다. 이 속담도 유명한 사명당의 일화 중 하나이다. 사명당이 강화사절로 일본에 들어갔을 때 일본 사람들에게 곤욕을 당했으나 도통한 도술로 화를 면했다 한다. 그들은 사명당을 잡아 큰 솥 속에 넣고 불을 떼어 증살하려 했다. 사명당이 그 솥 안에서 얼음 빙(氷)자를 써서 끓는 물에 넣고 주문을 외자 삽시간에 솥 안에 서리가 뽀얗게 서렸다 한다. 그러기에 사명당의 사처방은 추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의 허실(虛實) 이전에 그 이야기가 속담으로 정착하기까지 된 데는 배일감정의 화신인 사명당의 공감공약수의 크기를 짐작케 해준다. 이와 같은 일화의 발생은 결코 우연일 수는 없다. 왜란이 명군의 원조로 끝나기는 했으나 당시 민심은 미구에 다시 쳐들어오리라는 의구심이 대단했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왜국의 조선에 대한 적개심이 두려워, 외교적으로 해결할 방책을 세우지 못했다. 또한 재침력 여부의 염탐을 할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사실 그만한 큰일을 감당해 낼 만한 용기와 역량을 가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에 들어가면 잡혀 죽을 것이라는 것이 통념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목숨을 내걸고 국낭을 수습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희생물로 나선 이가 사명당이었다. 사명당이 일본으로 떠난다는 소문이 팔도에 퍼지자 금방 인심이 일신(一新)되었다. 「묘당(廟堂)의 정승은 있으나마나, 나라의 안위가 한낱 중의 손에 달렸다니.」 민중들은 이렇게 즐거운 한탄을 읊기까지 했다. 행명을 도박한 이 사명당의 용기를 두고 당시 민중의 의구심이 <사명당의 사처방="">같은 이야기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한국사에서 이같은 플러스적 가치의 그늘에는 반드시 마이너스적 가치의 음습한 이끼가 끼게 마련이듯이 이 대업을 마치고 돌아온 사명당은 실망의 보수를 받는다. 그는 귀국할 때 납치당한 동포 3천 명을 쇄환(刷還)해 오는데 성공한다. 한데 이 피랍 동포를 관리하는 통제사 이경준(李慶濬) 예하(隷下) 관리들의 횡포는 너무나 비정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 피랍인들을 엄중히 문초하여 어릴 때 잡혀 간 사람으로 자기의 집을 모르는 자는 자기의 종으로 만드는가 하면, 예쁘고 젋은 여자는 모두 자기 첩으로 삼았다. 이 횡포가 탄로나자 이경준은 파면되고 이운용(李雲龍)이 대신 관리하였으나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참했던 피랍인들의 생태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쇄환해 온 사명당에게 있어 이같은 횡포는 그로 하여금 어떤 인생의 허무로까지 비약시키게 한다. 사명당이 조정을 등진 것은 이같은 부조리 때문이었다. 사명당이 가야산 해인사 옆의 조그만한 암자에 들어앉은 것은 예순다섯 살 때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무르려 했으나 뜻밖에도 오래 머물렀다」는 유명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스님이 거처했던 암자는 지금 홍제암(弘濟庵)으로 그 형적(刑跡)을 유지해 내렸고, 스님이 열반했던 방은 영당(影堂) 또는 영자전(影子殿)이라 하여 영조 때 그린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홍제암 뒷산에 사명당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부도(浮屠)가 있는데 비명을 보면, 「유해를 다비(茶毘)할 때 정주(頂珠)사리 한구를 얻어 그 자리에 부도를 세워 안장하였다」했으니 곧 다비하던 현장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비석은 스님이 입적한 지 2년 후에 세워졌다. 비명은 유명한 진보주의적 사상가요, 행동가인 허 균이 써서 한결 더 돋보인다. 허 균은 사명당의 행동주의적 사상을 흠모해 왔고 또 그의 형인 허 봉(許 )이 사명당과 절친한 사이였던 연분으로 이 비명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이 비석은 경술국치 때 울렸고, 해방 전에 소리치게 했으며 또 앞으로 일본과의 국난이 예상될 때마다 외쳐댈 것이다. 배일의 메카로서 그 존재 가치를 돋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명당 비령(碑靈)은 절규를 위해 목청을 가다듬고 있을지 모르겠다. 「가다듬겠지, 가다듬어야 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이 배일 성지를 등진다. - 2005/08/29 23:11 에 작성 사명당의>지봉유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