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292341
이규태의 <역사산책> - 김정 유배지
김정(金淨) 유배지(流配址)
옛 선비들은 참 멋이 있었다. 유람할 때나 출타할 때 선비들은 풍류낫으로 불리는 낫 하나를 배낭에 꽂고 떠난다. 어느 풍취(風趣) 앞에 시흥(詩興)이 솟으면 이 풍류낫으로 소나무 밑둥을 펀펀하게 깎아 시판을 만든다. 필묵을 꺼내어 그곳에 시 한 수 써놓고 지나간다. 마치 나뭇잎에 이슬이 맺히듯 어느 시공에 방황하는 미를 이슬처럼 응집시켜 살아 있는 나무에 결속시켜 놓고 떠나간다. 이런 풍류가 세상 어느 다른 나라에 있었는가 싶다.
중종 15년인 1520년 윤달이 든 가을, 소장과격파 정치가로 일세를 떨쳤던 충암 김 정(沖菴金淨) 판서는 제주도로 가는 유배길에 해남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조광조(趙光祖) 등 젊은 엘리트 학자들이 지치주의(至治主義)라는 이상주의 정치를 실현코자 과격한 개혁을 시도하다가 보수세력에 거슬려 일어난 정치파동이 기묘사화(己卯士禍)요, 조광조와 더불어 혁신파의 쌍벽인 김 정은 이 사화로 유배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배낭에는 풍류낫이 꽂혀 있었다.
그는 바닷가의 노송 아래에서 쉴 때 풍류낫으로 시판을 깎았다.
바닷바람 불어올 때 슬픈 솔소리 저 멀리 울리고
산(山) 달 외로이 떠오르니 솔여윈 그림자 성글기도 하다
곧은 뿌리 땅 밑까지 뻗어 있어 눈서리 겪은 자태 안 보이게 보이네
가지는 꺾인 채 잎새는 흩어진 여인머리
도끼에 찍힌 몸을 모래 위에 눕히고자
슬프다 동량지재 당초의 희망 이젠 그만이로다
뻣뻣한 그대로 해선(海仙)의 뗏목이나 되려니.
이 해남해송(海南海松)의 시는 그 후의 사림사회에 애송되어 기개있는 선비를 적지 않이 울렸고, 또 <해선의 뗏목="">은 과거의 시운으로도 자주 출제되었던 것이다.해선의>
제주에 유배 온 김 정은 가락천(嘉樂川) 냇가에서 살다 이듬해에 사약을 받고 숨졌다. 그 가락천 가에는 그가 먹고 살았던 샘물이 판서정(判書井)이란 이름으로 극히 근래까지 전해 내렸으나 20여 년 전후 행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1백여 년 후인 선조 11년에 김 정이 살았던 이 가락천 가에 충암묘(沖菴廟)를 세워 유덕을 기렸고, 그 후 이 묘 이름을 귤림서원(橘林書院)으로 고쳐 제주도에 유배왔던 유현(儒賢) 송인수(宋麟壽)·김상헌(金尙憲)·정 온(鄭蘊)·송시열(宋時烈)을 배향(配享)했던 것이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을 없앴다가 1892년 지방 유생들이 서원 터에 단을 쌓고 다섯 분을 모시기에 이른 것이다.
충암유지비(沖菴遺址碑)는 이 오현단(五賢壇)으로 옮길 때 실수로 떨어뜨려 반 토막이 났고, 웬일인지 그 하반은 없어지고 <충암김선생적로(沖菴金先生謫蘆)란 대목까지만=”” 남은=”” 상반=”” 비신(碑身)만이=”” 오현단=”” 한쪽=”” 구석에=”” 서=”” 있을=””>
충암유지를 거닐면서 필자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그 하나는 이상주의의 급진적 혁명이 한국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구조적인 회의였다.
사화로 죽음을 당할 때 세 명의 주역인 조광조는 서른여덟 살로 대사헌이요, 김 정은 서른여섯 살로 판서요, 김 식(金湜)은 서른여덟 살로 대사성이었다. 그토록 높은 벼슬에 오르기에는 파격적인 젊음이었으며 중종을 비롯, 당시 조정에서도 이들의 유별난 학식과 재기를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趙光祖)은 아깝게도 현철한 자질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능을 가졌으나 학문이 대성되기 전에 너무 급하게 요직에 올라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권문세가의 비방을 막지 못하여 충성을 바치려다가 오히려 몸이 죽고 나라가 어지러워져 뒷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겁내어 감히 바른 정치를 해오지 못하게 했다.」
<축수편(逐睡篇)>에 보면 「조광조는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 않고 과격한 습성을 부려 화를 자초했다」했고, <당적보(黨籍譜)>에는 「김 정은 모든 건의를 할 때 서슬이 너무 드러나고 또 갑작스러운 확장을 꾀하여 너무 서두르는 결함을 면치 못했다」했다.
한국인은 크게는 정치집단으로부터 작게는 촌락집단에 이르기까지 가족의식과 가족적 인간관계로 그 집단을 형성시켜 왔다. 어른이나 선배가 무능하더라도 아버지나 웃사람을 모시듯이 응분의 대접을 해주고 그들의 응낙과 동의를 얻음으로써 질서를 유지했다.
한데 이 신진학자들은 현량과(賢良科)라는 특과로 신진세력을 규합하고 그들의 이상적 지치주의 정치를 펴기 위해 기성 정객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가족적 질서를 대담하게 타파함으로써 반발을 샀던 것이다.
또한 농경민족의 보편적 특성으로 이미 이전에 있었던 기존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상고보수적 성향에 역행한 데서 반발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한국사에서 이상적 정치체제로의 갑작스런 변혁이 가능하지 못했던 것도 한국인의 이같은 의식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 초기 조 준(趙浚) 등에 의한 경제개혁, 하 윤(河崙) 등에 의한 행정개혁, 정도전 등에 의한 종교개혁은 이태조가 정치권력을 잡은 후에 그 혁명 정치 체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권력의 비호 밑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조광조의 개혁과는 그 질이 다른 것이다.
조광조의 실패 때문에 한국에 도학이 정착하는데 1백여 년이 지연되었다는 후세 유학자들의 말은 사실(史實)이다. 도학정치를 혁명적 수단으로 하려 했기 때문에 도학이 사학시(邪學視)되었음은 뻔하다.
우리는 이같은 역사적 사례를 김옥균·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 소장 엘리트들에 의해 일어났던 개화 혁명인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들 수가 있다. 당시 고종은 마치 중종이 조광조의 도학정치를 이해하고 장려했듯이 개화사상을 이해했고 개화를 시도했었다. 그런데 기존 질서와 절충융합한 점진적 개혁이 아닌 혁명적 개혁이었기에 이 바람직한 개화정치 체제는 삼일천하로 끝나고 그 때문에 개화사상은 사학시당해 적어도 한국에 개화를 가져오는 데 수십 년 동안의 지연을 가져왔던 것이다.
한국사에 있어서 어떤 발전은 ○냐 ×냐 하는 혁명이 수반되는 극단적인 택일에 의해 이루어지는 법이 없었고 기존가치에 새로운 이상적 가치가 절충융합하는 △식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은 김 정 시대의 권신(權臣)이나 김옥균 시대의 권신이 악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의식체질이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그 강세의 의식구조가 작동을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이 유지에서 문득 생각나는 것은 김 정이 제주도에 유배당하게 된 데 얽힌 한 추악한 한국인의 이야기다. 처음에 김 정이 유배당한 곳은 충청도 금산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군수요 그의 감시자인 정 웅(鄭熊)에게 문병차 다녀올 것을 청원하여 이틀간의 유배지 이탈을 허락받게 된다.
사실 당시 벼슬아치들은 잦은 정변으로 어떻게 세상이 뒤바뀔지 모르기에 유배당한 정객에게 미소책을 쓰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었다. 정 웅도 시류에 편승하여 감자와 꿩, 술을 보내기까지 했다.
김 정을 제거시키기 위한 명분을 찾기에 부심하고 있던 심 정(沈貞), 남 곤(南袞) 등은 이 유배지 이탈을 망명죄로 국문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필자가 역겹게 생각하는 것은 증인으로 나타난 정 웅의 증언이다. 「충암이 도주한 것을 나는 전혀 몰랐었고 감자와 꿩과 술을 주었다는 것도 꾸며낸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김 정이 사형을 받게 한 것이다. 이 사군자(士君子)를 죽음으로 몰고간 상황이 정 웅 한 사람의 일이라면 필자 굳이 이 유적지에 와서까지 그를 되뇌일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역사 속의 한국인이나 그 피를 물려받은 현재의 한국인에게 어느만큼씩의 그 더러운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는 개연성 때문인 것이다. 그 정 웅적인 소질은 떼어내어 발로 비벼 없애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유전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몸 어딘가 모르게 또 가려워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가려운 부위를 찾지 못하고 꿈틀거리기만 하는 역사성의 가려움이다.
지금 오현단이 된 충암묘 터에는 화려한 몇 층 오각 정자가 들어서 있고 경내에 아파트 같은 시멘트 집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인 충암의 유적이라곤 반 토막난 비석을 한쪽 구석에 꽂아놓았을 뿐이었다. 또 오현 유적이라 해야 비석 하나없이 겨우 손바닥만한 화산석(火山石) 댓 조각을 무문(無文)으로 꽂아 놓았을 뿐이니 무슨 관리가 이렇게도 주객이 전도되게 했는가 모를 일이다. 유배지에 와서 죽음을 당한 것만도 서러운데 선인들이 극진히 모셨던 사우(祠宇)도 없이 그 곁에 오현을 빙자한 화려한 정자며 고층 시멘트 집이 웬 말인가.
충암이 즉을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에, 「밝은 이 단심을 풀숲에 묻고 당당하고 장한 뜻은 중도에서 꺾였으니, 아 천추만세 후에 응당 나를 위해 울어주리」했는데 유일하게 남았던 판서정마저 없어져 버리고 비석만 반 토막난 채 버려져 있다. 이 판국에 그의 못 이룬 큰 뜻을 위해 울기 이전에 요즈음 사람들의 선현에 대한 무심함에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할 것이다.
- 2005/08/29 23:41 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