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302251

중국여행기 - 4.구이린

  1. 구이린 (계림 : 桂林)

    구이린의 명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 즉 계림의 산수가 천하 제일이라는 오래된 구절을 마음속에 새기며, 언젠가는 반드시 가보겠다는 생각을 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1순위로 정해놓은 곳이기도 하다.

    시안을 끝으로 고도(古都) 순례를 마친 뒤 구이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이동시간 29시간, 직선 거리만으로도 1500km는 족히 되는 여정이다. 앞으로 언제 그렇게 오랜 시간 기차를 타게 될 기회가 있을까.

    구이린 역에 내리자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우리를 맞았다. 사진으로나 보았던 열대지방의 나무들이 거리 곳곳에 늘어서 있고, 북쪽에서 보기 어려웠던 화창한 날씨와 강렬한 햇빛, 이것만으로도 벌써 다른 세계에 온 느낌이었다.

    우리 나라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도시인만큼 상당히 더울 것으로 예상했는데, 슬프게도 예상대로였다. 남쪽 나라 여름의 땡볕 속을 걷는 일은 힘든 일이다. 그나마 맑은 날씨 덕분에 덜 습해서, 땀은 많이 나지 않았지만.

    사실 구이린에 온 목적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배를 타고 산수를 감상하는 리강 유람이다. 그러나 이 확실하다고 믿었던 계획은 하마터면 무산될 뻔 했다. 이유는 바로 600위안(우리돈 약 9만원)이 넘는 비용이었다. 아직 여행이 반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거금을 단 하나의 구경을 위해 쓴다는 것은 확실히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구경을 하고 싶었던 나와, 만만찮은 비용을 걱정한 다른 일행들 간에 잠시 마찰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에든 방법은 있는 법, 다행히 가까운 양수오(양삭:楊朔)에도 비슷한 방식의 유람관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용은 구이린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구이린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조금 짧은 것이 아쉽긴 했지만, 이정도면 훌륭한 절충안인 셈이다.

    양수오는 구이린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이다. 구이린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내린 곳은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한가한 시골 동네였다. 거기에다 구이린 지방 특유의 기묘한 산세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낮은 건물들이 주욱 붙어있는 거리와 잘 어울렸다.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관광객은 제법 많은 듯, 주차장에는 작은 버스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이 버스들은 단지 관광객만을 태우는 것은 아니었다. 양수오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시골을 돌면서, 곳곳에 사는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주는 모양이었다. 마치 옛날 우리 나라에서 읍내를 나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것과 흡사했다.

    구이린과 양수오 지방은 카르스트 지형이라고 한다. 즉,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형이 침식을 받아 울퉁불퉁해진 지형을 말한다. 그래서 이 일대는 어딜 보아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기묘한 형태의 산 뿐이다.

    버스에는 물론 중국인이 가장 많았지만, 우리 이외에도 관광을 온 유럽, 호주 사람들이 더 있었다. 보통 서양인들은 구이린에서 출발하는 비싼 관광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들도 우리처럼 돈이 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여담이지만, 가까이서 본 백인들의 피부는 주근깨 투성이였다.

    양수오에서도 차로 한참을 더 가서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그야말로 진정한 시골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곳)에 도착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만 이미 수 시간을 허비한 뒤라, 도대체 진정한 유람은 얼마나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생각에 작은 한숨이 나왔다.

    잠시 기다리던 일행은(물론 같이 온 서양인들도 포함해서) 마침내 작은 배에 올라탔다. 길이는 십여 미터, 높이는 2~3미터에 지나지 않고, 함석 지붕이 위를 덮고 있었다. 출발하자 많은 사람들이 경치를 잘 보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갔는데, 햇볕을 가득 받은 함석 지붕은 대단히 뜨거웠다. 시간이 지나서 익숙해 진 뒤에야 비로소 주변의 풍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과연 세상은 헛이름을 전하는 법이 없다더니 구이린의 명성 또한 헛것은 아니었다. 기기묘묘한 봉우리를 떠받치듯이 리강의 푸른 강물이 느긋하게 흐르는 모습, 강을 따라 펼쳐진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강 한가운데 떠있는 대나무 한 통으로 만든 듯한 작은 배, 원시시대를 연상케 하는 강변의 열대림,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모든 감각을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다. 돌아갔을 때 식구들에게 그 유려한 경관을 보여주고 나 자신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생각에서 그리한 것이지만, 어찌 말로 표현 못할 이 산수를 작은 사진 몇 장에 다 담아갈 수 있을까. 구이린의 산수는 그 전체를,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는 현장에서 느껴야만 진정한 것이다.

    다만 나의 예상과 조금 달랐던 것은, 굳이 화창한 한낮의 날씨 탓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처음에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같은, 안개 낀 몽환적인 분위기의 산수를 기대했지만 아무래도 삼협(三峽)이나 혹은 다른 곳의 모습과 혼돈을 일으킨 것 같다. c0003499_22464558.jpg

    아직 시골같은 분위기의 양수오에 비한다면, 구이린은 제법 큰 도시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처음 이 도시에 도착해서 적지않이 놀란 것이 바로 그 점인데, 단순히 아름다운 산수를 상상하고 그에 걸맞는 한가로운 시골 풍경을 추가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중국의 도시들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아마 이 구이린 역시 그러한 곳 중 하나일 것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큰길 양옆으로는 상당한 규모의 번화가가 조성되어 있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넓은 도로로 다니는 자동차들 역시 중국의 어느 대도시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

    특히 관광지라는 특성 때문인지, 밤이 되면 시가지 전체가 훌륭한 구경거리가 된다. 갖가지 색의 빛으로 거리를 수놓는 수많은 조명들의 빛을 감상하며 구이린의 밤길을 걷는 것은 연인과의 데이트에 어울릴 듯한 이벤트. 큰길을 따라서 수많은 노점상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데, 이들이 펼치는 천막은 국가에서 일제히 지원한 듯,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다만 구역별로 색깔만이 다를 뿐. 빨강, 파랑, 초록의 색색가지 노점상이 화려한 조명과 어우러져 활기찬, 어찌 보면 황홀한 구이린의 야경을 연출해낸다.

    한동안 걷다보니 거리 한쪽으로 멀리 밝은 조명을 한 탑이 보인다. 낮에 보았을 때는 단순한 탑인 줄 알았던 것이, 밤이 되어 몸 전체를 불빛으로 치장하니 주변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게다가 탑이 서 있는 곳은 작은 호수의 위, 그 광경이 어떨지는 상상에 맡긴다.(사실 이쯤되면 구이린에서 수많은 아름다운 광경을 묘사하는 것 자체가 내 짧은 글솜씨로는 불가능하다. 뻔한 형용사로 입맛만 버리느니 차라리 개인의 상상력에 기대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효과적인 방법일 지도 모른다.) c0003499_2244754.jpg [처음 글을 쓸때는 사진파일이 없었기 때문에 위와 같이 써 놓았다]

    구이린에서 본 것 중 특기할 만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칠성굴(七星窟)이라고 부르는 종유 동굴이다. 일반적인 동굴에 비해 조금 특이한 점은, 지상에서 출발해서 지하로 들어가는 동굴이라기보다는 산을 올라서 산 속을 통과하는 동굴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굴 내부는 상당히 손을 많이 본 모양이었다. 곳곳에 각양각색의 조명으로 장식을 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원색의 빛이 어우러져 제법 묘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동굴 속이라 무척 시원했다. 날씨는 맑고 시간은 한낮이라 밖에서는 땀이 줄줄 흘렀지만 동굴 속은 냉방 시설 잘 된 건물처럼 쾌적했다.

    다만 관광용으로 개발한 것이라 사람의 손이 너무 많이 간 듯한 느낌을 주기는 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멋있을 동굴을 너무 많이 인위적으로 고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래된 종유 동굴에서 이따금 발견된다는 동굴 진주(cape pearl)이 있을까하고 찾아보았지만 아무래도 이처럼 사람이 만져놓은 곳에서는 발견이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단지 아름다운 산수만을 기대했던 나에게 구이린의 여러 색다른 모습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처음으로 직접 본 열대 지방의 미끈한 나무들, 화려한 조명과 볼거리로 장식된 밤의 거리, 잘 가꾼 공원과 신비로운 동굴 등… 이번 여행에서 드물게도 많은 기대를 품고 와서 기대 이상으로 얻어간 곳이기도 하다. 앞서 지났던 시안과 더불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으로 꼽는 구이린, 앞으로 계속될 남쪽 지방의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구이린의 낯선 광경은 이후의 도시들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앞으로는 과연 어떤 새로운 모습들이 내 앞에 펼쳐질지… 다음은 중국 속의 영국, 홍콩(香港).

  • 2005/08/30 22:51 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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