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072345
1년 전 와우를 시작하면서
생각해보니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시작한 지도 만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나야 중간에 반 년 정도 쉬었으니 실제로 플레이한 시간은 반 년 정도이긴 하지만, 그 사이에 참 많은 일을 겪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올해 초, 그러니까 오픈베타도 슬슬 끝나갈 무렵, 입사연수 중에 어느날 저녁, 내 유일한 캐릭터가 반 년 간의 수면에 들어가기 직전의 모습이다. 당시만 해도 더이상 와우를 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연수기간 중에는 시간이 날 리 없었고, 연수가 끝난다 하더라도 직장인의 신분으로 학생 때와 같은 생활을 할 수는 없을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지금은 다시 하고 있지만)
내 캐릭터는 트롤 여자 마법사였다. 약 두 달간의 폐인 생활 덕분에 오픈 베타가 얼마간 남아있음에도 만렙에 조금 모자란 57렙을 만들어 놓았고, 당시까지만 해도 서버 내에서도 그정도면 꽤 높은 레벨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키운 녀석을 영원히 잠재우자고 마음 먹었으니 나름대로 아쉬운 마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마지막으로 수행한 퀘스트는 저멀리 남쪽의 운고로 분화구였다. 때마침 접속한 트롤 여사제 세뇌탐정 씨 덕분에 쓸쓸히 퀘스트를 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감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퀘스트를 마치고 보상을 받기 위해 올라간 언덕에서,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지평선의 모습은 생생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둘이 나란히 렙터에 올라탄 채로 언덕 위에 서서 저멀리 석양을 향하고 있었고, 주변은 참으로 조용했다. 마치 스타워즈 에피소드 3 마지막 장면에서 오비완이 루크 스카이워커를 아나킨의 이복형, 그러니깐 루크의 삼촌에게 데려다 주자 그 부부가 루크를 안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장면이었다. 미처 스크린샷을 남기지 못한 게 다소 아쉬울 뿐이다.
원래 처음 와우를 시작할 당시 같이 캐릭터를 만들고 시작한 친구들이 있는데, 각각 전사, 사제, 흑마법사, 드루이드였다. 나를 포함해 딱 다섯 명으로 정확히 한 파티가 되는 인원이었다. 물론 통상적인 전사, 사제, 주술사, 도적, 마법사라는 구성에 비해 상당히 특이하고도 비효율적일 수 있는 파티 구성이긴 하지만, 어쨌든 항상 다섯이 모여서 던전 퀘스트를 수행했다. 초기 저레벨 던전부터 상당히 고레벨 던전까지, 기억하기로 거쳐가는 모든 던전을 위와 같은 파티로 도전했던 것 같다. 중간중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도중에 포기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실수로 파티가 전멸한 적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재미있게 와우를 즐겼던 시간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서 반 년이 지났고, 우연한 계기로 다시금 와우를 시작하게 되어서 길드에도 가입하고 틈틈이 레이드에도 참여하는 등 다시 바쁘게 접속하게 되었다. 같이 했던 친구들은 처음에 파티 클래스 하나를 잃게 되어 고민하다가 결국 한 길드에 단체로 가입을 했고, 그 길드는 서버 내에서 가장 강력한 길드가 되었다. 일찍부터 레이드에 도전한 덕분에 하나둘씩 보랏빛으로 몸을 물들이고 (에픽 아이템이 보라색임) 화산심장부 - 오닉시아 둥지 - 검은용둥지로 이어지는 상위 레이드 던전을 모두 경험해 보았다. 나는 뒤늦게 다시 시작하여 만렙을 만들고, 이곳저곳 따라다니면서 좀 더 좋은 아이템을 갖추기는 했지만, 반 년 간의 공백은 따라잡을 수 없을만큼 큰 것이긴 했다. 뒤쳐진 것 자체는 별로 마음쓰지 않지만, 이제는 예전과 같이 다섯이서 힘겹게 던전에 도전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아쉬운 건 사실이다.
최근 길드 내에서 저레벨 길드원을 돕기 위해 예전에 한 번 갔던 던전을 다시금 가볼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들어가 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한동안 잊고 있던 던전의 내부 모습이 반갑기도 했다. 다시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나면서 레이드 던전 등에 조금 열의가 식었는데, 길드내 지원을 핑계삼아 예전에 다섯이서 온갖 고생을 하며 헤쳐나온 그 던전들을 다시 가봐야겠다.
- 2005/11/07 23:45 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