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242327

<무라카미 라디오> - 넓은 들판 아래에서

  •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라카미 라디오="">에 실린 글을 제멋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 신주쿠의 서쪽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라고 하는 건 <특별히 글로="" 쓸만한="" 것이="" 없었다="">라든가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라는 식으로 복잡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단지 휑하니 넓은 허허벌판 뿐이었다. 지금은 그곳에 고층 빌딩과 호텔과 도청 등등이 세워져 있다. 그걸로 해서 무엇이 편해졌는가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지만서도 뭐, 편리해졌겠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 출근을 하거나 쇼핑을 하러 외출을 하고 있으니깐. 하지만 나-무라카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편해졌다는 느낌은 없다. 신주쿠 서쪽이 예전의 허허벌판인 상태에서도 그다지(전혀)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뭐랄까, 그쪽이 오히려 시원하니 더 좋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지만 장래 도시계획의 일부로서 그당시부터 지하도만큼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신주쿠에서 놀다가 밤이 깊어져서 기숙사나 하숙집에 돌아가는 일이 귀찮아질 때는, 그리고 마침 춥지 않은 계절이라면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서 뒹굴뒹굴거리곤 했다. 그때는 아직 노숙자는 없던 시절이다. 비슷한 또래의 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아침까지 시간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하도는 깨끗하고 안전했으며, 어떤지 얘기한다면 공동체같은 친근함이 퍼져 있었다. 어느 땐가 사진사를 지망하는 친구가 내 초상을 찍어주었다. 흑백사진이었다. 나는 머리를 길렀고 열아홉 살이었으며 콘크리트의 바닥에 앉아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림질을 하지 않은 반팔 셔츠를 입고 청바지와 스웨드 가죽의 데자트 부츠를 신고 무척이나 반항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뭐가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야라고 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각은 오전 세 시, 아마도 1968년의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뽑아서 나에게 주었다. 이전에도 썼던 것처럼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 사진만은 나 자신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인간이 품고 있는 것들이 아른아른 떠다니고 있었으며 사진 입자의 뭉치 속에 시대의 분위기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잠시동안 그 사진을 소중하게 갖고 다녔지만 이사를 여러 번 거치면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진을 찍은 날 밤의 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가까이에 혼자서 푹 웅크리고 있던 깡마른 남자애가 있어서 말을 걸어보았다. 타치가와 고등학교의 삼학년생이었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하고 그는 말했다. <여자 친구가 임신을 했는데, 그 상대가 내가 아니야>라고. 그래서 위로할 길도 없었지만 어떻게 위로해볼까하고 서투르게 노력을 했던 일이 기억난다. 모두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신주쿠의 서쪽에 갈 때마다 <옛날에 여기는="" 넓은="" 벌판이="" 있었지="">하고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뭐가 어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 2005/12/24 23:27 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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