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5292234

언어는 (확실히) 진화한다

생물의 진화와 관련해서 알고 있는 한가지 가설은 ‘한 종류의 생물은 진화하면서 크기가 커진다’는 것이다. 생물학을 전공하지 않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내용은 그렇다. 예를 들면, 화석으로 남아있는 말의 조상은 지금의 말보다 크기가 작다. 코끼리의 조상뻘인 매머드도 그렇고 사람 역시 원시인은 현대인보다 키가 작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공룡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 등장했던 공룡이 수 미터 정도였던 것에 반해, 중생대 말기인 쥬라기나 백악기의 공룡들은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종류도 있었다고 한다.

뜬금없이 생물의 진화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위에서 나온 화석의 후예가 아니라) 역시 이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 때문이다. 흔히 언어(말)는 시대가 바뀌면서 변한다고 하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변화가 아니라 진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대 간 표현의 차이라든지 언어 파괴의 주범으로 손꼽히는 외계어 등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 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평범한 말이 진화하는 것이며, 그 사실을 얘기해보고 싶은 것 뿐이다.

언어의 크기가 커진다는 것은 언뜻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주변을 돌아보면 옛날보다 몸집을 불린 표현들이 귀를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곤 한다. 집과 학교를 오가던 시절,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우리 나라를 보통 한국이라고 불렀다. 언제부터인가 좀 더 위대한 느낌을 주는 대한민국이라는 단어가 신문, 방송, 이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마저도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더욱 크기를 키워서 대애애(大)한민국 이라고 힘주어 부르는 것이 일상화되어 버렸다. (이상하게도, 미국은 아메리카합중국,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하다못해 중화민국이라고도 불러주지 않는다) 그밖에도, 100년 넘게 올림픽의 최고상은 금메달이건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꼭 필요한 신용카드는 언제부터인가 골드(Gold)를 기본으로 하여 플래티넘(Platinum)을 지나 뜻을 알 수도 없는 수많은 이름을 가진 각양각색의 카드가 등장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보고서나 자료를 작성할 때도 ‘최적의’, ‘극대화’, ‘전략적’ 등의 낱말은 어쩐지 평범함을 느끼게 하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 같고, 공연장의 A석은 B, C를 뒤에 둔 것만이 아니라 R, S 등을 앞에도 놓게 되어 알파벳 첫 글자라는 상징이 무색하게 되어버렸다.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던 한 소녀(이제는 성인이 되었나)는 자신의 미숙한 작품에 거창한 장르를 붙여 소개했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렸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고 과거의 것이 가치를 잃어가는 현상은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스통에 끼워놓은 풍선이 부푸는 것처럼 점점 위대해져 가는 일상의 표현을 바라보면서 그 옛날 멸종해버린 공룡이 생각나는 것 또한 피할 수가 없다. 공룡이 생활력에 비해 너무도 거대해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지금 우리의 언어는 그 실체에 비해 너무 거대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언젠가 사람들이 더이상 상대방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비로소 언어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이미 멸종한 파충류과 같은 처지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혼자만의 기우이기를 바란다.

  • 2006/05/29 22:34 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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