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122140
슬럼프
측정 불가능한 주기로 찾아오는 것이 분명한 초우울모드가 다시 돌아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 가지 정도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머피의 법칙처럼 이것들이 겹치고 겹쳐서 지금 상태가 되었을 터.
우선 하나는 내 생활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회사일. 사실 입사 후 항상 그랬듯이 일이 바빠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나에겐 먼나라 얘기일 뿐이다. 아는 사람들이 늦게 퇴근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은근히 미안한 감정마저 느끼곤 했으니까. 문제는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는 점이다. 과제가 한창 진행중이므로 열심히 바쁘게 일해야 마땅하겠지만, 어쩐지 요즘들어 자리에 앉아 손가락만 빨고 있는 일이 부쩍 늘었다. 회사 분위기때문…이라고 핑계대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열심히 자기 일을 하고 있으므로 변명거리도 안된다. 그보다는 과제가 기대만큼 잘 진행되지 않는 점, 게다가 그것이 주로 정치적(?) 인 문제라는 게 더 크지 않나 싶다. 남을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어쩐지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 같다. 뭔가 극적으로 일이 풀리지 않는 이상, 이 상태가 쉽게 호전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거기에 다른 서비스 쪽에서 이런저런 문제제기와 함께 요구사항이 딸려오면서 팀내에 은근히 눈치까지 보인다. 물론 빠릿빠릿하게 처리한다면 무난하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의욕 저하 -> 업무 능률 하락 -> 이러쿵저러쿵 -> 의욕 저하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보고서나 회의 등 상당 부분 업무를 남에게 떠넘긴 경우도 있고.
또 하나는 이제 곧 발표가 나올 어드미션과 관련이 있다. 평소 누가 물어볼 때면 쿨하게 “어차피 안달한다고 빨리 나올 것도 아닌데.”라고 대답하지만, 막상 일정이 다가오니 마음이 무겁다. 더군다나 2월 들어서 하나둘씩 결정이 난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스펙이나 경력으로 보아 “당연히 될만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학교 역시 확실한 인재는 먼저 확보해 놓고 애매한 경우를 좀 더 따져보는 것 같다. 그게 세상의 이치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부럽달까, 성적이든 연구든 경력이든 뭔가 확실한 “꺼리”를 만들어 놓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이젠 나이도 서른이 가까워서 학부생들처럼 뭔가 새로운 도전을 통해 경력을 만들어 놓기도 어렵고. 설령 운좋게 어드미션을 받아도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그건 아직까지는 그다지 큰 부담은 아니다.
마지막은 내 평소 생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작년 한 해는 시험보랴, 지원서 쓰랴 이런저런 확실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생활의 목적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원이 끝나고 나면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서 달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2009년도 벌써 한 달 반 가까이 지나가지만, 과연 그동안 (지원서를 내고난 이후인 작년 12월부터) 대체 무얼 했는지 자문해도 답이 없다. 이렇게 어영부영 적당히 회사 다니고, 적당히 월급 받으면서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져버렸다. 만약 공부를 더 할 수 없다면 대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종잡을 수가 없다. 회사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5년, 10년 뒤에 그런 모습이 된다고 생각하면 결코 유쾌하지 않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고 조직에 얽매여야 하는 삶. 하지만 지금 당장 뭔가 새로운 걸 시작할 만한 실력과 용기도 없는 주제에. 병역특례 기간이 끝나고 퇴사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있는 한 선배를 볼 때마다 무력감에 휩싸인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운이 좋다면 며칠 안에, 그보다 안좋다면 1,2 주 정도 지나서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고민하는 문제들이 과연 깔끔하게 해결될 지 자신은 없다. 다만 우울함에서 벗어나면 잠시 잊을 수는 있겠지.
- 2009/02/12 21:40 에 작성